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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 좀비’ 퇴출 이후 남은 것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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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방현 기자 중앙일보 내셔널부장
김방현 대전총국장

김방현 대전총국장

대전 서구 월평동에서 18년째 김밥집을 운영하는 장모씨는 얼마 전 가게를 내놨다. 요즘 매출이 급격히 줄어 남는 게 없기 때문이다. 가게 앞에 있던 마권장외발매소(화상경마장)가 지난 3월 말 철수하면서 이렇게 됐다고 한다. 그는 “화상경마장이 없어진 뒤 고객이 80% 이상 줄었다. 황당한 일”이라고 했다.

장씨가 매출 감소보다 더 황당해하는 것은 화상경마장 퇴출 과정이다. 화상경마장은 자치단체가 세수(稅收)를 확보하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한다며 유치했다. 1999년 7월 문을 연 이곳에서는 과천 서울경마장 등에서 열리는 경기를 생중계했다. 경마가 열리면 하루 평균 2400여 명이 이곳을 찾았다. 한국마사회가 운영하는 화상경마장은 현재 전국에 27개가 있다.

그런데 2014년부터 정치인,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퇴출 운동이 시작됐다. 도박 중독을 부추기고, 교육환경을 망친다는 게 이유였다. ‘도박 좀비’가 어슬렁거린다는 말도 돌았다. 이후 선거 때마다 후보들은 화상경마장 퇴출을 앞다퉈 공약했다. 2017년 대선에서는 문재인 후보 지역 공약으로 채택됐다. 하지만 화상경마장이 도박 중독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제시된 근거는 찾기 어렵다. 교육환경을 망친다고 했지만, 인근 학교에서는 이런 시설이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한다.

지난 3월말 문을 닫은 대전 마권장외발매소. [뉴스1]

지난 3월말 문을 닫은 대전 마권장외발매소. [뉴스1]

화상경마장 폐쇄 후폭풍은 거셌다. 음식점 등 점포는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또 이곳에서 일하던 건물 관리 요원, 환경미화원 등 260여 명 대부분은 일자리를 잃었다. 한국마사회 측이 이들을 다른 지역 경마장으로 배치했지만, 출퇴근 문제 등으로 그만뒀다고 한다. 자치단체 손해도 컸다. 한국마사회에서는 연간 약 200억원(레저세·교육세·농특세)을 대전시에 냈다. 지금까지 낸 세금은 3700억원에 이른다.

7년 동안이나 퇴출 운동을 했는데 후속 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국회의원을 포함한 지역 정치인들은 “나 몰라라” 하고 있다. 화상경마장이 입점했던 대형 빌딩은 텅 비어있다. 건물 주인인 한국마사회는 아직 빌딩 처리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다.

화상경마장 퇴출 운동 명분은 ‘유해 시설을 없애자’는 이른바 ‘착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선동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상황은 낯설지 않다. 예를 들어 집권 세력은 종합부동산세와 전국민재난지원금 등 주요 정책마다 ‘상위 2%’ ‘하위 80%’처럼 ‘커트 라인’을 정했다. 이는 선거 공학적 계산에 따라 계층별 대립 구도를 만드는 것이란 지적을 받고 있다. 또 ‘비정규직 제로’ 정책은 비정규직을 더 많이 만들고 있다. ‘정의 실현’ 등을 내건 ‘착한 정책’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기승을 부릴 조짐이다. 그 참담한 결과는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