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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누가 턱걸이를 하든 원산폭격을 하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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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6호 31면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우리나라 신문기자들은 반성해야 한다. 물론 나를 비롯해서다. 이토록 좋은 환경에서 지금 정도밖에 신문을 못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좋은 환경이란 엔트로피 높은 대한민국이다. 재활용업체에는 쓰레기가 많이 나와야 좋고, 자동차 수리업체에는 접촉사고가 많은 게 좋다. 신문기자들한테도 사건 사고가 많은 게 장땡이다.

뉴스거리 쏟아지는 사회에서 #신문독자 주는 건 기자들 탓 #아무말 대잔치 옮기지 말고 #말 대신 일하는 사람 만나야

뉴욕타임스나 르몽드, 더타임스 같은 서구 신문 1면을 보라.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그렇다고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를 길게 늘어놓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다. 눈이 확 떠지는 뉴스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가 체계적이고 안정적이다 보니 상식을 깨는 돌발뉴스가 그만큼 없는 까닭이다. 변명 같지만 서구 언론의 탐사보도가 발전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야 어디 그런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자고 일어나면 벌어져 있는 사회다. 놀란 눈 뜨고 입 다물 수 없는 일들이 하루가 멀다고 일어난다. 이번 주만 해도 그렇다. 대부분의 조간이 월요일자 1면에 청해부대 집단감염 사태를 전했다. 화요일엔 청해부대 집단감염자가 247명으로 늘었다는 소식과 함께 대통령이 도쿄 올림픽에 안 간다는 뉴스가 나왔다. 수요일엔 청해부대원 귀국에 청와대의 이광철 민정비서관 사무실 압수수색 거부 기사가 실렸다. 목요일엔 대통령 최측근인 김경수 경남도지사에 징역형을 확정한 대법원 판결을 보도했다.

금요일엔 조간 1면들이 제각각이었는데도, 예전 같으면 1면톱이었을 도쿄 올림픽 개막식 기사가 비교적 작게 취급됐다. 그만큼 다른 뉴스거리가 많다는 얘기다. 1면 편집자가 고민할 이유가 없다. 역시 변명 같지만 우리네 탐사보도가 뒤처진 이유이기도 하다. 매일매일 뉴스가 쏟아지니 굳이 공들여 탐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토록 뉴스가 많은데도 신문 독자들이 줄어든다는 건 분명 신문을 잘못 만들고 있다는 거다. 신문기자들이 반성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물론 내용보다는 플랫폼의 문제가 더 크다. 언제 어디서건 정보 접근이 가능한 유비쿼터스(이 용어조차도 진부하게 들리는) 시대에 하루 한 번 발행하는 (더구나 인력 배달이 필요한) 종이신문은 시대에 뒤떨어진 메신저인 게 사실이다.

선데이칼럼 7/24

선데이칼럼 7/24

하지만 변명이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신문이 디지털 전환에 주력했지만 크게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클릭 수 경쟁에 매몰돼 선정적인 토픽 양산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메이저 언론들마저 자신들만이 할 수 있는 고품질 기사를 생산하기보다는, 고만고만한 기사들을 쏟아내기만 함으로써 스스로 마이너 언론들과 하향평준화한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이 어느 한 언론사의 홈페이지를 굳이 선택해서 들어갈 필요가 없게 되고, 언론사들을 줄 세워 재주 넘게 하는 포털만 배를 불리고 있는 것이다.

말이 길어졌지만 공연한 넉두리를 늘어놓자는 게 아니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은 바로잡혀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참이다. 그것은 이 땅의 신문사와 신문기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나라 언론, 나아가 이 나라의 미래(어쨌든 권력 남용을 감시할 언론이 있어야 하므로)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상황 타개를 위해 밤낮으로 고민하고 있을 언론사 경영진들에게 훈수를 두는 건 분수에 넘치는 일이다. 다만 제작 측면에서 동료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보려 한다. 차고 넘치는 SNS 주장들을 중계방송하지는 말자는 거다. 특히 SNS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부류들의 주장과 지지자들의 무조건적 호응, 상대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대응들을 날것으로 독자들에게 전하지는 말자는 거다.

누구나 SNS에서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다. 누구나 지지 댓글을 달 수 있고 반대 의견도 말할 수 있다. 이미 SNS는 언론의 영역에 들어섰고, 팔로워가 많은 유력인사의 글은 어지간한 언론 기사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SNS는 SNS 담장 안에 놔두기로 하자.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마음껏 주장하고, 찬양하고, 비판하게 내버려 두기로 하자. 굳이 기사로 옮겨 언론과 독자의 수준을 떨어뜨리지는 말자는 얘기다. 팔로우하지도 않는 사람이 턱걸이를 하든, 그 지지자가 원산폭격을 하든 내가 알 바 아니다. 누가 누구에게 경비행기를 태워주겠다고 꼬셨는지 아니든지 궁금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보게 되니 짜증이 난다.

요즘 정치인들이 SNS 정치를 하니 기자들이 신경을 안 쓸 순 없겠다. 하지만 그것도 무시할 건 무시해야 한다. 말이 안 되는 정치인 SNS 얘기를 기사화하려면 그것의 진위를 밝혀서 써야 하는 거다. 그런데도 무슨 말만 하면 무조건 옮겨대니 아무말 대잔치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 사이 독자와 더불어 언론의 수준이 떨어지고 정치가 희화화되며, 국격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무엇이든 말로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오늘날 중국을 G2를 자처하는 강대국으로 만든 초석을 다진 이는 말 많던 마오쩌둥이 아니라 말 아끼던 덩샤오핑이었다. 마오는 스스로 대자보까지 써붙였지만, 덩은 단지 24자만을 말했을 뿐이다.

지금 기자들이 만나야 할 건 덩과 같은 사람들이다. SNS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하느라 SNS를 할 시간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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