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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무산된 대통령 방일, 그 길 뿐이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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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장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장

대통령의 도쿄 올림픽 계기 방일 계획이 막판에 무산됨으로써 정부 임기 내에 한일 관계개선을 모색할 마지막 기회가 사라졌다. 정상방문 준비가 이견과 막말로 점철되고 급기야 무산되었으니 그 파장이 상당할 것이다. 한국은 일본의 경직성과 무성의에 분개할 것이고, 일본은 한국이 무리한 요구로 남의 잔치를 어지럽혔다고 분개할 것이다.

관계개선 기회 놓친 것 아쉬워 #방일해 도쿄올림픽 축하하고 #양국 분위기 전환계기 삼았어야 #향후 한일관계 유지 부담 커져

올림픽 계기 방일 건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 교훈을 얻기 위해서라도 이런 경로가 불가피했는지, 다른 경로는 없었을지를 차분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초 한국은 올림픽 계기 방일 의사를 밝히면서도 정상회담의 격식과 성과가 담보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세웠다. 격식과 관련하여 한국은 정식 회담을 바랐고, 위안부와 징용 등 과거사, 일본의 수출규제, 후쿠시마 오염수 등에서 성과를 거두고자 했다. 그중에서도 수출규제 철폐에 집중했다. 일본은 일단락되었던 과거사가 한국 내 사정으로 다시 불거졌으므로 한국이 해법을 가져와야 한다는 기존입장을 견지하면서,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우니 약식회담을 하자고 했다.

그러던 중에 주한 일본 공사의 부적절한 발언이 나왔다. 한국은 응당한 조치를 요구했다. 사실상 소환을 요구한 것이었다. 일본은 발언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했으나 응당한 조치는 바로 내놓지 않았다. 회담 격식과 성과에 대한 일본의 입장에 변화가 없고 문제의 발언에 대한 일본 측 대응속도도 성에 차지 않는 가운데 방일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높아지자 한국은 계획을 접기에 이른다.

이상이 그동안의 상황 전개이다. 이 경로를 되짚어 보노라면 자연히 몇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첫째로 한국이 제기한 정상회담의 성과는 그간 한일이 벌여온 현안 공방을 감안할 때 달성이 불가능에 가까운데, 어찌하여 그것이 목표로 설정되었는지 궁금하다. 예컨대 징용문제에 대한 한국의 해법이 없으면 일본이 수출규제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지 사실이다. 이번 방일 계기가 기본적으로 올림픽 축하인데 정상회담 성과 목표를 너무 높게 잡다 보니 일이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둘째로 수출규제가 그처럼 중요한 주제인지 의문이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인한 실제 피해는 별로 없다. 일본이 규제를 적극 적용한 바 없고, 우리가 대체재를 개발한 점도 있기 때문이다. 수출규제 철폐보다 차라리 ‘관계개선을 위한 긍정적인 분위기 조성’을 더 중요한 주제로 간주했어야 하지 않을까?

셋째로 일본 공사의 문제 발언에 대한 한국의 강공은 일본으로 하여금 신속히 잘못을 인정하도록 만들었으나, 정작 정상회담의 격식과 성과에 관해서는 일본의 부정적 결기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인상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우리가 다른 경로를 택했더라면 어땠을까? 한국이 현안과 관련하여 새로운 해법을 제시할 입장에 있지 않고, 일본도 기존입장을 바꿀 가능성이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 정상이 도쿄 올림픽에 대처하는 옵션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첫째는 회담 성과가 기대되지 않으므로 정상방문을 추진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아예 조건을 달지 않고 올림픽 개막식에 가는 것이다. 명분은 얼마든지 있다. 이웃 나라 올림픽에 가서 축하하는 것이 마땅하고, 아베 총리가 평창에 축하하러 왔으므로 이번에는 우리 정상이 가서 축하하는 것이 도리이며, 우리 선수단을 격려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 된다.

만일 우리가 두 번째 옵션을 택하여 방일하고, 3개 현안 등에 대해 간략한 정상회담을 한 후, 후속 논의를 할 장관급 대화 채널 개설에 합의하고 돌아오는 식의 접근을 한다면 여론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베 총리가 평창에 왔을 때, 성과를 담보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한 것도 아니므로, 우리 대통령이 조건 없이 도쿄에 가서 올림픽을 축하하고 가벼운 정상회동으로 꽉 막힌 한일관계의 숨통을 트고 새로운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는 정도의 성과를 낸다면 여론의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 길은 가지 않은 길이다. 우리는 다른 길로 갔고 일은 벌어졌으니 이제는 앞일을 대비해야 한다. 당장 정상회담 무산으로 초래된 냉기류를 통제해야 한다. 또 우리가 일본 아베 총리의 평창 올림픽 참석에 답례하지 않은 나라로 비치게 된 부담을 어떻게 풀어 갈지도 고심해야 한다. 더욱이 내년 초에는 북경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린다. 대통령은 북경 올림픽에 갈 공산이 아주 크다. 그때 우리가 중국에게 정상회담의 격식과 성과를 미리 담보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건 없이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 대통령은 도쿄 올림픽에는 안가고 북경 올림픽에는 가는 셈이 된다. 한국외교의 원칙과 균형을 어떻게 설명할지 고심해야 한다.

이처럼 도쿄 올림픽 계기에 정상 방일을 추진했다가 접은 일은 우리에게 많은 과제를 안겼다. 이제 정부가 임기 내에 한일 관계개선의 전기를 마련할 수는 없겠지만, 관계가 더 나빠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할 정부의 책무는 더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