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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미 글로벌 전략 '테러와의 전쟁'에서 '중국 견제'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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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년 만에 끝나는 아프간전

2001년 9·11 테러로 시작된 아프간전. 미국의 최장 전쟁인 아프간전이 다음 달 31일 미군의 완전 철수를 끝으로 20년 만에 막을 내린다. 2011년 5월, 최종 목표였던 오사마 빈 라덴을 파키스탄에서 사살함으로써 전쟁 목적을 달성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아프간 내 무장세력인 탈레반을 소탕 못 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사실상 패배라는 시각이 많다. 이 때문에 아프간전은  '제2의 베트남전'으로도 불린다. 그렇다면 두 전쟁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아프간전의 경과와 함께 이 전쟁의 종식이 한반도 안보 지형에 끼칠 영향도 짚어봤다.

2014년 4월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 동쪽 지역을 미군과 아프간군이 순찰하고 있다. [AP]

2014년 4월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 동쪽 지역을 미군과 아프간군이 순찰하고 있다. [AP]

'테러와의 전쟁', 아프간전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심장부의 세계무역센터가 여객기 테러로 무너지자 당시 부시 행정부는 범인 색출에 혈안이 됐다. 미국은 조사 끝에 오사마 빈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의 소행이며 이들이 아프가니스탄에 숨어있음을 알게 됐다. 이에 미국은 아프간을 통치하던 탈레반 정권에 범인 인도를 요구한다. 그러나 탈레반 정권은 이를 거부, 미국이 곧바로 아프간 침공에 나서게 된 것이다.
당시 미국은 아프간 내 반(反) 탈레반 세력을 이용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썼다. 반 탈레반 부족으로 이뤄진 '북부동맹'을 지원, 이들로 하여금 탈레반 정권을 섬멸케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북부동맹 공격 시 대규모 공중 지원을 제공하면서도 지상군은 특수부대 중심의 최소한의 인원만 파견했다. 베트남전 때처럼 대규모 사상자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지난 5월 아프간 헬맨드주에 위치한 앤토닉 캠프에서 미군과 아프간군 간의 임무 교대식이 진행됐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5월 아프간 헬맨드주에 위치한 앤토닉 캠프에서 미군과 아프간군 간의 임무 교대식이 진행됐다. [로이터=연합뉴스]

전쟁 초기는 예상대로 일방적인 미국의 승리였다.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미국에 최빈국 아프간은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북부동맹 반군은 개전 한 달 만에 수도 카불을, 두 달 만에 탈레반의 근거지인 칸다하르를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1만명 안팎의 탈레반 병사가 숨진 반면 미국 측은 불과 16명만이 희생됐다. 초기 아프간전이 얼마나 일방적이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아프간인들은 19세기부터 외세의 침략을 물리쳐온 강인한 민족이다. 19세기 중반 이래 3차례에 걸친 영국과의 전쟁 끝에 1919년 독립을 이뤄냈다. 1979년부터는 10년간 싸워 소련의 침공을 이겨냈다. 불굴의 정신력에다 국토 대부분이 험준한 산악이어서 게릴라전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8일 미국 백악관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오는 8월 말까지 아프간 주둔 미군이 완전히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UPI=연합뉴스]

지난 8일 미국 백악관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오는 8월 말까지 아프간 주둔 미군이 완전히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UPI=연합뉴스]

이런 배경 속에서 파키스탄으로 도망쳤던 탈레반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지 세력을 규합해 2003년쯤부터 기나긴 반미 투쟁을 본격화한다. 미군으로서는 아프간 장악은 쉬웠지만, 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미국 편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탈레반 대신 내세웠던 카르자이 정권의 무능과 부패로 탈레반 지지세력은 갈수록 퍼졌다. 탈레반은 80년대 소련에 맞섰던 아프간 내 무자헤딘 반군에게 미국이 줬던 무기로 격렬하게 저항할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2011년 오바마 행정부는 10년간 쫓아온 빈 라덴을 찾아내 사살하는 데 성공한다. 아프간전을 마무리할 명분을 찾은 것이다. 미국은 이에 따라 탈레반 측과의 평화협상을 본격화했다. 문제는 미군이 빠져나올 경우 베트남 패전 때처럼 탈레반이 다시 아프간 전체를 장악할 공산이 크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아프간 철수를 계속 미루다 결국 조 바이든 대통령이 완전 철군을 결정하게 된다.

다음 달 아프간 내 미군 완전 철수 #철군 후 탈레반이 전역 장악할 듯 #미, 테러단체 대신 중국 주적 삼아 #닉슨 때와 달리 주한미군 강화할 듯

베트남전 대 아프간전
아프간전은 여러 이유로 '제2의 베트남전'으로 불린다. 오랜 기간에 걸친 미국의 해외 전쟁인 데다 건강한 친미 정권 수립에 실패한 채 철수한다는 점에서 두 전쟁은 빼닮았다. 베트남전은 9년, 아프간전은 무려 20년이나 지속했다. 아프간전은 아버지 세대가 시작한 전쟁을 아들 세대에서도 수행해 '세대의 전쟁 (war of generation)'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엄청난 전비가 뿌려졌다는 점에서도 똑같다. 양쪽 모두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조 달러가량이 사용됐다.
이와 함께 미국으로서는 세 가지 점에 다른 전쟁들과 크게 달랐다. 첫째는 미국이 한편이 돼 같이 싸운 남베트남 정권과 카르자이 정권 모두 믿지 못했다는 점이다. 두 정권은 똑같이 무능했으며 극도로 부패해 미국이 원조한 무기를 팔아먹기 일쑤였다. 남베트남군과 카르자이군 역시 오합지졸이었으며 적과 내통한 자들도 많아 미국은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길 극도로 꺼렸다. 합동작전은커녕 없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였다.
둘째, 미군은 적군을 확실히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싸워야 했다. 베트콩, 탈레반 반군 모두 평소에는 주민 사이에 섞여 있다 갑자기 미군을 공격하기 일쑤였다. 이들과 일반 양민을 가려내기 힘든 미군으로서는 주민 모두를 몰살시키지 않는 한 불의의 기습을 피할 길이 없었다.
셋째, 미군은 땅속의 적군과 싸워야 했다. 베트콩들은 몸집 작은 베트남인들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개미집 같은 튼튼한 땅굴을 곳곳에 마련해두고 미군의 폭격을 견뎌냈다. 최대 수십 km에 달하는 이런 땅굴을 발견해도 몸집 큰 미군 병사들은 드나들 길이 없었다. 아프간전에서는 땅굴 대신 산악 동굴이 반군의 은신처로 사용됐다. 미군이 지상군이 아닌 공중에서의 공격으로 동굴에 숨은 탈레반 반군을 섬멸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 세 요소 모두 미군으로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이런 문제에다 전쟁 장기화에 따른 내부 반대 여론 탓에 결국 세계 최강의 미국이 베트남·아프간이라는 후진국과의 싸움에서 백기를 들게 된 것이다.
이런 배경으로 아프간전과 베트남전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시각이 있지만 두 전쟁이 크게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우선 인적 피해 면에서는 비교가 안 되는 건 사실이다. 사망자 5만8000여명에 부상자 30만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낸 베트남전과는 달리 아프간전은 2400여 명이 숨지고 2만 명이 다치는 데 그쳤다. 2배가 넘는 기간임에도 아프간전의 사망자는 베트남전의 4.1%, 부상자는 6.6%에 불과했다. 소수의 특수부대만을 투입하고 드론 등 무인 공격을 활용한 덕분이다.
이와 관련,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 8일 완전 철수를 앞두고 "아프간은 베트남과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아프간 정부군이 굳건해 미군이 철수한 뒤에도 베트남 때와 같은 혼란과 탈레반에 의한 정권 장악은 없을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는 미군이 현지를 지키지 않는 한 현 아프간 정권 유지는 사실상 어려워 탈레반에 의한 아프간 장악은 시간문제로 보고 있다.

75년 4월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자 헬기로 탈출하는 미국인들. [위키피디아]

75년 4월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자 헬기로 탈출하는 미국인들. [위키피디아]

아프간전 종식과 한반도 안보
베트남전은 한반도 안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엄청난 인적 손실과 천문학적 전쟁 비용 탓에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던 리처드 닉슨은 "미국은 더 이상 해외 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아시아는 아시아가 지켜라"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71년 닉슨 행정부가 미 7사단을 철수시킴으로써 6만6000여명이던 주한미군은 4만여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그렇다면 아프간전 종식은 한반도 안보에 어떤 영향을 줄까. 아프간전은 베트남전과는 달리 한국 안보 상황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아프간에서의 미군 철수는 2001년 미국이 글로벌 전략으로 삼아왔던 '테러와의 전쟁'이 마무리됐음을 뜻한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이슬람 테러 섬멸을 명분으로 2001년 아프간, 2003년 이라크를 침공했다. 아프간전은 올 8월까지 계속됐지만, 이라크전의 경우 2011년 12월 종전됐다고 미국은 선언한 바 있다. 또한 미 정보기관과 군부의 집요한 노력으로 알카에다 등 이슬람 과격단체는 대부분이 궤멸했다. 따라서 이제 미국은 테러 단체가 아닌 새로운 적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바로 중국과의 싸움이다. 실제로 미국은 2017년도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를 통해 중국이 자국의 전략적 지위에 도전하는 유일한 경쟁자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글로벌 전략 수정은 미군의 운용에도 영향을 준다. 테러 조직은 정확한 소재가 불확실한 데다 계속 근거지를 옮긴다. 테러 조직과의 전쟁터가 어디가 될지 모른다는 얘기다. 때문에 테러와의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에든 달려갈 수 있는 기동력이 절실하다. 대규모 부대를 어느 한 장소에 붙박이로 주둔시킬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또 이슬람 테러단체가 가장 큰 문제여서 아무래도 중동 지역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반면 중국을 주적으로 삼을 경우 부대 운용과 전략도 바뀌게 된다. 테러단체와는 달리 중국군은 실체가 명확하다. 어디에,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지 알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미군도 여기에 맞춰 운용하게 된다. 물론 지역적으로는 아시아가 중시된다.
현재 중국은 해양세력인 미국이 바다를 통해 공격해 오는 것을 해안선 및 근해에서 막아내는 소위 '반(反) 접근·지역거부(A2/AD)'전략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미국은 이를 분쇄하기 위해 주둔군 증강 정책을 추구하는 만큼 닉슨 독트린과는 달리 주한미군 강화 정책이 추진될 가능성도 있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