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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균열의 퍼스펙티브

‘소련군=해방군’ 용어는 세계 공산화 노린 선전선동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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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해방군·점령군 논쟁, 어떻게 봐야 하나

러시아 화가 칼 파블로비치 브률로프가 그린 역사화 ‘가이세리크의 로마 침략.’ 검은 피부의 반달족 병사들이 로마의 부녀자를 유린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실제 반달족은 라틴족인 로마 시민보다 피부가 희고 키가 컸다고 한다. 반달족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드러난 사례로 볼 수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러시아 화가 칼 파블로비치 브률로프가 그린 역사화 ‘가이세리크의 로마 침략.’ 검은 피부의 반달족 병사들이 로마의 부녀자를 유린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실제 반달족은 라틴족인 로마 시민보다 피부가 희고 키가 컸다고 한다. 반달족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드러난 사례로 볼 수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사이 도덕철학은 회의주의에 빠졌다. 명사(名詞) 중심의 도덕성 탐구에 회의가 생겼다. 이러한 조류의 대안적 시도로 캐나다 도덕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자아의 원천들(Sources of the Self)』에서 새로운 현대 도덕철학을 제시했다. 그가 제시한 인간의 올바른 정체성은 내면성, 일상적 삶에 대한 긍정, 개성, 자연의 목소리, 섬세한 언어로 요약된다. 이들은 모두 명사적 진리로서의 도덕성(=眞)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착함(=善)과 아름다움(=美)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테일러가 언급한 “하느님은 부사(副詞)를 좋아한다”는 대목은 큰 의미가 있다. 부사는 문법에서 부수적인 품사이다. 굳이 없어도 의사소통에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부사가 있을 때 진정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이 부사가 있기에 더 기쁜 일에 더 큰 웃음을 지을 수 있고, 더 슬픈 일에 더 많은 공감으로 서로 위로할 수 있다.

카이로회담의 신탁통치 결정 거쳐 대한민국 건국 #한반도에서 일본군의 무장 해제 위해 미·소련군 주둔 #미군, 신탁통치 위한 군정과 건국준비단의 역할 맡아 #일본 항복하기 직전 개입한 소련은 민간인 약탈 일삼아 #잘못된 사실 퍼뜨려 나라를 불신·불화에 빠뜨려선 안돼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역사를 소위 명사로만 이해하려는 폐단이 있다. 이런 접근은 역사적인 문제에 실체적 진실이 단 하나만 존재한다고 여기고, 다른 개연성을 모두 배제한다. 북한을 근거 없이 추종하는 자를 지칭하는 ‘종북좌파’나 일본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자를 지칭하는 ‘친일파’와 같은 용어가 전형이다. 이러한 명명법은 각기 북한과 일본을 대화의 주제로 여기지 않고, 완고한 명사적 지위를 갖는 가치로 여기는 일종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최근 광복회 회장이 한 고등학교에 보낸 영상편지에서 ‘소련군은 해방군이고 미군은 점령군이다’라는 강연은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놨다. 지금도 광복회 홈페이지에는 “친일청산 없이는 국민통합이 불가능합니다. 민족을 이간시키는 데만 몰두하는 친일 반민족 세력의 청산 없이는 남북통일도 불가능합니다. 적폐청산의 핵심은 바로 친일 청산입니다”라는 문구가 버젓이 게재돼 있다. 그렇다고 필자가 친일행위를 찬양하려는 게 아니다. 필자의 외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오사카에 노동자로 끌려가 광복 후에 귀국했다. 어머니는 당시 다섯 살이었는데 부관페리호를 타고 귀국할 때 바닷물이 시퍼렇다못해 검었다고 기억했다.

이제 광복회장의 주장대로 ‘소련군은 해방군, 미군은 점령군’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이 문제는 자구대로 해석하지 말고 맥락 속에서 볼 필요가 있다. 재판에서도 사건의 실체적 진실만큼이나 정황 증거가 중요하다. 우선 한반도의 특수성을 알아야 한다.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맞았다. 해방은 우리의 노력이 있었지만, 더 정확히는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승리로 선물처럼 ‘주어진’ 것이었다. 여기서 선조의 피로 물든 항일투쟁을 간과해선 안 되지만, 그때 상황이 그랬다는 것이다. 일제 당시 한반도에는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엔 대한제국의 형식적 전통과 상해임시정부의 지위가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못한 대격변기였다.

흔히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 대한민국 건국의 출발이 온전치 못했다고 하면서 프랑스를 예로 든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엄연한 국가로 존재하고 있었고, 자신의 나라를 다른 나라에 넘기지도 않았다. 따라서 전승국들은 프랑스를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는 문제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프랑스는 성공적으로 친나치 세력을 일거에 제거하고, 전후 국가재건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 상황은 전혀 달랐다. 1910년 한일합방부터 해방까지 36년간 나라가 없어졌다. 전승국인 미국 입장에선 일본 본토에 대해서는 미군의 상륙작전이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무장해제가 필요없었다. 그러나 일본이 점령했던 다른 지역, 특히 한반도에서는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소련과의 역할분담이 필요했다. 그에 따라 미·소 협의로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북에는 소련군이, 이남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소련의 북한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보여주는 과거 문건

소련의 북한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보여주는 과거 문건

그렇다면 미군은 점령군이었을까? 포고령 글자대로라면 점령군이 맞다. 하지만 미군은 초기엔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해, 이후엔 신탁통치를 위한 군정의 역할을 하게 됐다. 그래서 미군이 남한 지역에 계속 주둔했다. 말하자면 미국은 조선인 스스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신탁통치가 필요했고, 그래서 군대를 파견한 것이었다. 신탁통치는 이미 국제적 협약이 정한 원칙이었다.

전승국들은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고,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한반도를 전후 질서 재건의 주요 의제로 생각했다. 이에 앞서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 모인 미국·중국·영국의 수뇌들은 한국의 독립문제를 고민했다. 카이로 회담은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념하여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in due course), 자유롭고 독립되어야 할 것을 결정한다”고 발표했다. 신탁통치를 거쳐 한국민의 완전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신탁통치 기간은 최초 계획에는 40년이 상정됐다가 최종적으로 5년으로 확정됐다. 5년을 다시 3년으로 줄인 것은 대한민국을 만든 건국인들의 공헌이었다. 이 내용은 이후의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에도 계승됐다. 따라서 당시 미군은 일본군 무장해제와 대한민국 건국 준비가 목표였다.

반대로 소련군은 진정한 해방군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1945년 38선 이북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을 ‘해방군’이라 한 것은 전형적인 공산주의자의 레토릭에 불과하다. 소련은 한반도 독립을 처음으로 천명한 카이로회담(1943년 11월)의 당사국도 아니었다. 또 소련은 카이로 회담을 계승한 포츠담회담에 참석은 했지만, 회담기간 중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명시한 포츠담선언(1945년 7월 26일)에는 동참하지도 않았다. 소련이 한반도에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 항복이 임박해서다. 당시 소련은 포츠담선언이 공표된 지 열흘가량 지난 8월 8일에야 약삭빠르게 전쟁 종결에 참여했다. 소련의 이익이 걸려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 진주한 소련군은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명분으로 갖은 약탈을 일삼았다. 당시 38선 이북 지역을 관할했던 소련 민정청 문서에 따르면 공장설비, 곡물과 가축 등을 소련으로 이송하기 위해 해방 직후부터 1946년 상반기까지 소련과 북한 사이의 일반화물 및 여객 수송을 전면 중단시켰다. 약탈의 대상에는 여성도 포함됐다. 영화배우 김지미가 주연하고 이장호 감독이 만든 영화 ‘명자 아끼꼬 쏘냐’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소련군이 한국인을 총으로 위협해 손목시계를 뺏어 양 손목에 찬 뒤 희희낙락했다는 것도 괜한 얘기가 아니다.

소련군이 ‘해방군’이라는 용어는 선전선동술이었다. 당시 소련은 1917년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 이후 3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공산주의 종주국으로서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진행했다. 무엇인가 그럴듯하게 선전선동을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저의를 숨겨뒀다. 외형적인 표방과 달리 내면은 전 세계 공산화다. 그 과정에서 무력행사도 불사한다. 북한 헌법에는 ‘언론·출판·집회·시위와 결사의 자유’(제67조), ‘신앙의 자유’(제68조) 등이 규정돼 있지만, 실제로는 보장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우리 사회가 더 안정적인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주제가 갖는 다양한 가치에 대해 균형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 일본을 반대하면 옳고, 북한을 지지하기만 하면 옳다는 단순한 시각으로는 복잡한 국제사회의 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없다. 과거 일본 제국주의가 비난받는 것은 당시 한국인의 인격과 한국의 산천초목을 일제를 위한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단지 일본이라는 이유로 미워하는 게 아니다.

북한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지만 한국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후에도 KAL기 폭파테러, 천안함 폭침 등 헤아릴 수 없는 무력도발을 일삼았다. 이런 북한의 비인간적인 행태에 대해서도 똑같은 잣대로 비난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함께 항일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북한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결국 해방공간에서 주한미군을 점령군이라고 비판한 것은 잘못된 사실에 근거한 오해이며, 폄훼다. 이런 시각은 역사적 실체와도 거리가 멀지만, 국민 화합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개인적인 소신을 일반화해서 국민 전체를 불신과 불화의 늪으로 빠지게 하는 일이다.

◆박균열

경상국립대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대에서 윤리교육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동·서양 역사와 철학에 관심이 깊다. 한국공공가치학회 회장과 대한변호사협회 검사평가특별위원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