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바람과 한반도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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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연일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같은 분단국의 입장에서 이제는「부럽다」는 흥분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오히려 냉철한 자기 성찰을 통해 남북한도 보다 실질적인 교류와 접근을 실현시키는 노력을 배가해야 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13일에 있은 다섯 번 째 남북적십자 실무접촉에서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데 대해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우리측의 많은 양보에도 불구하고 아직 현안으로 남아있는 예술 공연 단의 규모문제는 전체 문제의 테두리에서 볼 때 사소한 사항에 불과하다. 때문에 21일에 있을 6차 모임에서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우려하는 바는 북한이 최근 동·서독간에 장벽이 무너지고 서베를린으로 많은 동독 인들이 몰려왔던 사건에서 위축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동·서독간의 냉전구조가 해소되고 동독지도층이 개혁의 물결에 휩쓸려 무더기로 물러나는 사태를 북한이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할 가능성은 많다.
최근 북경을 방문한 김일성이 등소평과 함께 사회주의 체제의 수호에 합의했다는 보도는 그런 짐작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동유럽에서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광범하게 일고 있는 변혁이 그와 같은 방어적자세로는 막아질 수 없는 것임을 북의 지도자들이 냉철하게 인식하고 남북교류 문제에 임하기를 간곡히 권고하고 싶다.
우리는 비단 동구에서뿐만 아니라 중국과 심지어 필리핀·대만· 한국 등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비 공산권에서도 아래로부터 분출되고 있는 변혁의 욕구를 정치인들이 주도권을 잡고 선도하지 못할 경우 사태는 정치인의 손을 떠나 걷잡을 수 없는 현상타파로 줄달음친다는 요즘의 현상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동구사태는 북쪽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정치인에게도 중요한 교훈으로 받아들여져야 된다. 개혁의 욕구가 정치인들의 능력이나 실적보다 훨씬 앞지를 경우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북으로서는 내부개혁과 함께 남북간의 교류를 틈으로써 오래 경직된 체제아래 억제돼온 민중의 욕구에 안전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김일성 이후의 변혁의 과격성을 미리 막을 수 있는 안전판이라는 뜻에서다.
우리 사회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역시 정치인들이 6·29 이후 분출되고 있는 각 계로부터의 욕구를 5공 청산과 제도 개혁에 열성을 보임으로써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유도해 나가야 될 것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 남북간의 교류는 확실한 진로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북한은 동구권 역에서 세차게 휘몰아치고 있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외면하지 말고 실용주의 노선을 택함으로써 최소한 양 독간의 평화공존분위기가 한반도에도 정착되도록 우리 쪽 노력에 호응해야 할 것이다. 이 길만이 남북한이 또다시 대결과 불신의 골로 빠지는 사태를 예방하면서 한민족 공통의 염원인 통일로 향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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