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고객은 왕이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2021.07.2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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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창규 경제에디터

김창규 경제에디터

물건을 사려면 일단 줄을 서야 한다. 2~3시간은 기본이고 많게는 10시간까지 기다리기도 한다. 그리고 매장에 입장할 땐 신분증 ‘원본’을 제시해야 한다. 물건을 고르고 결제할 때도 본인 명의의 신용카드로 결제해야 한다. 물건도 아무거나 살 수 없다. 특정 상품은 1년에 1개, 인기품목은 한두 달에 2~3개만 살 수 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매장에 아무나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판매 유보 고객’으로 분류되면 어떤 방식으로도 제품을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매장 방문도 금지된다. 고객도 가려서 받겠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소비자는 왕’이 아니다. 오히려 판매자가 왕이다.

명품업체들, 매장서 출입 막거나
인원 제한 등으로 줄서기 강요해
고객이 판매자에 끌려다니는 꼴
결국 선택은 소비자 몫…신뢰 필요

샤넬의 ‘부티크 경험 보호정책’ 이야기다. 샤넬은 “(국내) 고객이 원활하게 부티크를 방문하고 상품을 공평하게 구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물건을 산 뒤 프리미엄을 붙여서 되파는 ‘리셀러(재판매업자)’를 막기 위해서라는 입장이다.

명품업체는 브랜드 가치를 생명처럼 여긴다. 단기적으로 매출이 줄더라도 장기적으로 브랜드 가치가 유지된다면 후자를 택한다. 이들 업체는 최근 국내에서 명품의 인기가 치솟자 보따리상이나 재판매업자의 사재기 탓에 브랜드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상품을 구하기가 어려울수록 그 상품을 더욱 사고싶어 하는 심리를 절묘하게 이용한다. 이를 위해 오랜 시간 줄을 서게 하고 물건값을 수시로 올린다. 여기에 각종 구매 제한까지 쏟아낸다. 그래도 많은 사람이 명품 매장 앞에 줄을 선다.

전문가는 명품이나 맛집처럼 오랜 시간 줄을 서게 하면 기다린 시간에 대한 보상심리로 물건이나 서비스를 더 많이 사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한다. 이런 탓에 요즘 줄서기를 대행해주는 업체나 알바 서비스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서소문 포럼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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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서기 대행이 옳은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경제학 입장에서 보면 줄서기는 수요가 공급을 초과해서 생긴 일이다. 즉 수요와 공급 기능의 실패를 뜻한다. 옛 공산국가에서 배급을 받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처럼 말이다. 그러니 가격을 차별화하면 줄은 자연스레 사라진다. 이런 관점에선 돈을 더 많이 쓴 사람이 줄서기 대행 등을 활용해 물건이나 서비스를 먼저 이용하는 건 자연스럽다.

하지만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줄서기 대행 등 비시장적인 방식이 시장논리로 대체되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줄서기 대행은 줄서기가 가진 평등주의 원칙을 깨뜨릴 뿐만 아니라 도덕의 범주에 있던 줄서기를 사고파는 시장의 논리로 재단했다고 비판한다.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줄서기 마케팅’으로 줄서기 대행은 더욱 확산하고 있다. 줄서기 대행은 3~4시간에 5만원을 받으니 최저임금(시급 8720원)을 훌쩍 넘어선다. 전문가는 명품 구매 열풍을 비쌀수록 수요가 느는 ‘베블렌 효과’나 특정 상품을 소비해서 그것의 주 소비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파노플리 효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제 ‘줄서기 소비’는 하나의 문화로 굳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인스타그램·유튜브 등의 확산으로 줄을 서서 물건을 사는 과정, 줄을 대행한 경험 등을 인증샷 등을 통해 다른 사람과 공유한다. 그리고 열광한다.

이런 현상은 음식점도 마찬가지다. 유명 맛집에선 앱 등을 통해 온라인 줄서기를 한다. 예약도 가려 받는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바뀌었을 뿐 방식은 같다. 그동안 소비자는 배달앱 등에서 별점이나 리뷰라는 무기 덕에 ‘갑’이었다. 일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특정 업체에 ‘별점 테러’를 가하기도 하고 공짜 서비스를 노리는 블랙컨슈머, 허위로 긍정·부정 평가를 남기는 ‘리뷰 조작단’까지 등장했다. 그러자 플랫폼업체는 리뷰를 별점 매기는 게 아니라 장점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바꾸기도 하고 아예 소비자 평점을 없애기도 했다. 또 허위 리뷰를 올린 사람을 고발하고 소비자의 리뷰를 모니터링한다. 이런 흐름을 보면 ‘소비자는 왕’이 아니다. 감시받는 대상일 뿐이다.

그래도 중요한 게 있다. 선택은 결국 소비자의 몫이다. 100년, 200년간 지속하는 ‘명품’이 되려면 일관된 품질과 브랜드 가치가 있어야 한다. 고객 만족이나 알맹이 없이 매번 ‘줄서기 마케팅’ ‘희소 마케팅’을 해봤자 본질은 드러나게 돼 있다. 오랫동안 명품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선 소비자와 신뢰를 쌓아야 한다. 이 제품(서비스)만은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는…. 지금 명품 브랜드는 고객과 이런 관계를 쌓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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