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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한 시대, 더듬거리며 길 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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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유자효 시인

유자효 시인

영국 목재 산업의 중심지 뉴캐슬. 아내를 잃고 자식도 없는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장병으로 더 이상 일하면 안 된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습니다. 아내의 긴 투병으로 가진 돈을 다 써버린 다니엘이 질병수당을 신청하러 가서 담당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담당자는 다니엘에게 전화번호를 누르는 데 문제가 없는지, 자명종 시계를 맞출 수 있는지 등 심장병과 상관없는 질문을 계속합니다. 그가 던진 농 한 마디가 담당자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그는 심사에서 탈락하고 실업급여를 신청하라는 조치를 받습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절규 #온라인 시대 가차 없는 “노인세” #적응할 것이 연속으로 오는 세상

1시간 50분 동안 비발디의 ‘봄’과 함께 나오는 대기음을 들으며 기다린 끝에 간신히 연결된 담당자는 구직 노력을 한 것을 입증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온라인으로 양식을 다운받아 인터넷으로 신청하라고 합니다. 자신은 스마트폰도 없고, 인터넷 사용법도 모른다고 하자 배워서 하라고 합니다. 구직센터에서 옆 사람의 도움을 받아 시도해보나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마침내 평소 그의 속을 썩이던 옆집 흑인 청년의 도움으로 인터넷 접수를 시켰지만 구직 노력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다며 탈락시킵니다. 그는 사실 작업장을 찾아다니며 구직 노력을 했으나 그것을 사진으로 찍거나 녹음을 해서 인터넷에 올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구직이 아니라 질병급여입니다. ‘항고해보라’는 담당자의 말에 따라 항고하려 하나 이도 인터넷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이 시작됩니다. 절망에 빠진 그는 마침내 센터의 벽에 검은색 스프레이로 크게 씁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굶어 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원한다.”

공기물 훼손죄로 경찰에 연행됐다가 훈방 조치된 그는 생활고에 허덕일 때 그가 도와준 두 아이의 미혼모 케이티의 도움으로 드디어 항고에 나섭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법원 화장실에서 심장이 마비돼 숨지고 맙니다. 장례식에서 케이티는 다니엘이 재판에서 말하려고 기록한 글을 읽습니다. “나는 보험번호 숫자도, 컴퓨터 화면 속 한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의 존중을 요구합니다.” 80세에 이 영화를 연출한 켄 로치는 2016년 황금종려상을 받았습니다.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들은 상영이 끝나자 모두 일어나 박수를 보냈습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컴퓨터와 인터넷 사용에 익숙하지 못한 세대들이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습니다. 온라인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소외된 노인들은 많은 손해를 감수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노인세”라고도 하더군요.

저만 하더라도 직장을 떠난 후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는 이메일을 읽고 글을 쓰고 보내는 일을 컴퓨터로 하지만 이것이 제가 아는 거의 모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 제게 아이패드를 선물했지만 저는 유튜브나 검색하고 영화를 찾아보는 것이 전부입니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줌(Zoom) 사용이 보편화 되었습니다. 어느 단체에서 줌을 이용한 회의 진행을 요청해왔습니다. 긴장을 하고 갔으나 주최 측이 준비를 다 해놓아 별일이 없었지요. 그러나 제가 참가자로 참여해야 하는 경우에는 헤매다가 결국 참여를 포기한 적도 있습니다. 제가 가입한 단체에서 인터넷으로 서식을 보내주고 내용을 채워 다시 보내 달라는 요구에는 도무지 발송이 되지 않아 프린트를 해 직접 가서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점점 더 복잡하게 진화하는 ID와 비밀번호의 조합 앞에 노인의 기억력은 백전백패하고 맙니다.

그런데 일곱 살짜리 손자는 저만 보면 스마트폰을 가져갑니다. 엄마는 행동에 제동을 걸지만 할아버지는 제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리고는 앱을 깔아 제가 하고 싶은 놀이를 합니다. 손자가 마치 외계인 같습니다. 이 아이들은 디지털과 한 몸이군요.

그러나 실망하지 맙시다. 6·25를 전후해 태어난 우리 세대들은 폐허에서 더듬거리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평생 낯선 곳에서 더듬거리며 길을 찾아왔습니다. 이은봉 시인은 ‘근대 적응’이란 시에서 우리 생애는 “컴퓨터에, 한글 워드에, 삐삐에, 자동차 운전에, 핸드폰에, 이메일에, 인터넷에, 문자메시지에, 스마트폰에, 카카오톡에, 페이스북에, SNS에, 웹에” 연속적으로 적응해오며 살아야 했다고 썼습니다. 우리는 이 난해한 시대도 결국 더듬거리며 헤어나가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