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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다양한 역할의 공존 보여주는 ‘로보카 폴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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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스승의 날 언저리 주말 오후에 귀여운 손님이 들이닥쳤다. 이제 제법 의사소통이 가능한 네 살배기 사내아이다. 대뜸 할아버지라 부르니 당황스럽기도 사랑스럽기도 한 이 녀석의 넘치는 활기를 가라앉히려 얼른 TV를 켜고 좋아할 만한 애니메이션을 검색한다. ‘로보카 폴리’. 전 세계 98개국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한국 애니메이션이란다. 양보와 배려, 사랑과 헌신을 통해 섬마을 ‘브룸스타운’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가꾸는 의인화된 자동차들의 일상적 이야기다.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는 폴리(경찰차), 의료를 책임지는 상냥한 엠버(구급차), 안전사고 해결사 로이(소방차), 정보력이 탁월한 헬리(헬리콥터), 힘세고 성실한 덤푸(덤프트럭), 마을을 깨끗이 청소하는 클리니(청소차), 질서를 잘 지키는 캡(택시), 우편배달차 포스티, 견인차 스푸키, 통학버스 스쿨비…. 일일이 나열하기에 어려울 만큼 다양한 등장인물(?)을 기어이 다 갖고야 말겠다는 아이를 둔 젊은 엄마 아빠는 그 덕에 허리가 휠 만도 하겠다. 건강하고 행복한 브룸스타운을 지속 가능한 공동체로 유지하려면 그중 어느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되니까 아이에게 “꼭 갖고 싶은 것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기보다는 식비를 줄여서라도 다 사줘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선생님께서 사주세요”라고 할까 무서워 입을 닫았다.

존중받아 마땅한 다양한 직업군 #‘무엇’보다 ‘왜·어떻게’ 생각해야 #경쟁 사회의 폐해 줄일 수 있어

아이가 타고난 소질과 성정에 따라 그중 한 길을 걸어갈 수 있다면 더없이 좋으련만, 그 맑은 마음에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현실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아이들은 행복한 브룸스타운을 자의 반 타의 반 하나둘 떠나간다. 간혹 왜 떠나야 하는지 묻는 아이에게 우리는 이렇게 답한다. ‘마을의 치안을 유지하려면 법조인이 되어야 한단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려면 의사가 되어야 한단다’ ‘지식을 탐구하려면 교수가 되어야 한단다’ ‘부자가 되면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단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우리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영악한 아이 모두 그 이면에 천민(賤民)자본주의에 물든 욕망이 투영되어 있음을 모를 리 없다. 한마디로 선망(羨望)하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선망의 사전적 의미는 글자 그대로 ‘부러워하여(羨) 바람(望)’이다. 부러워할 선(羨)의 자해(字解)를 살펴보니 ‘양(羊)고기를 보고 침(㳄)을 흘리다’는 뜻이다. 생리적 현상을 빗대 부러움을 절묘하게 표현한 이 한 글자 때문인지 선망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탐욕의 동의어처럼 느껴진다. 선망의 대상을 정하고 거기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삶을 어찌 탓할 수 있겠냐만, 그 대상이 부(富)와 사회적 지위로 획일화된 오늘의 현실은 ‘모든 길이 소중하고 존중받아 마땅하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부정한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상대적 박탈감, 공정성에 대한 의구심, 의구심이 사실로 드러날 때의 분노, 분노의 대상에 대한 적개심….

이 사회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자정력을 상실했다며 순응하는 삶은 비겁하다. ‘로보카 폴리’에 열광하며 브룸스타운같은 소박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아니 이 세상이 그렇다고 믿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부끄럽고 미안하다면 이제 그들에게 핸들을 맡기고 우리가 기꺼이 엔진과 브레이크가 되어야 할 때다. 청년은 ‘무엇’에 앞서 ‘왜’ 그것을 꿈꾸는지 되돌아보고, 이미 선택한 길을 걷고 있는 중년은 그것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선망의 자리에 도달한 이는 그에 값하는 말과 행동으로 질투가 아닌 존경의 대상에 이르고자 힘써야 할 때다.

‘그는 영리하고 밝고 분별이 빨랐다. 그러나 그가 이기적인 의도와 목표 때문에 기우술(祈雨術)을 습득하려고 했음이 차차 드러났다. 무엇보다도 그는 사람들의 신망을 얻고, 자기의 역할에서 명성을 얻고,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주기를 원했다. 천분(天分)을 타고난 자가 아니라 재능(才能)을 타고난 자의 허영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인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남을 지배하는 권력이나 이익을 노렸다.’ 1946년, 헤르만 헤세(1877~1962)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긴 『유리알 유희』의 한 구절이다. 자신의 재능을 이기적으로 쓰는 제자에 대한 스승의 탄식이 이어진다. ‘성격은 비열한데 지력은 높거나 상상력이 뛰어난 제자는 반드시 스승을 곤란하게 만든다. (중략) 그러한 제자는 가르침의 의미와 봉사를 완전히 비뚤어지게 해놓고 만다. 화려하게 비칠 수는 있어도 봉사할 수는 없는 그런 제자를 양성하는 것은 결국 봉사의 본의를 저버리고 정신에 대하여 배신을 범하는 일이 된다.’

40여년 전 ‘너는 어떤 제자인가?’를 물었던 헤세가 지금 ‘너는 어떤 스승인가?’를 묻는다. 그때도, 지금도 부끄럽기는 매한가지다.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