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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의 장담 31년 만에…경제·화폐·사회 ‘꽃피는 경관’ 달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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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호 27면

독일 통일 그 후 30년 〈9〉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베를린의 박물관섬. 1797년 슈프레강 가운데의 섬 위에 지어졌는데 독일 통일 이후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칩퍼필드의 계획에 따라 완전히 재정비됐다. [사진 위키미디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베를린의 박물관섬. 1797년 슈프레강 가운데의 섬 위에 지어졌는데 독일 통일 이후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칩퍼필드의 계획에 따라 완전히 재정비됐다. [사진 위키미디어]

독일 통일과 관련해 만들어진 신조어 중 논란의 대상이 된 것 중 하나가 ‘꽃피는 경관’이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후 불과 6개월 만인 1990년 5월 ‘경제·화폐·사회 통합 방안’이 신속히 결정되고 7월에 그 효력이 발생하자 많은 사람은 통일로 향하는 빠른 속도로 인해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실제로 화폐 통합이 이루어진 후 첫 수개월 동안 동독 산업의 참담한 현실이 드러나면서 많은 기업은 경쟁력 떨어지는 생산 활동을 바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장벽 붕괴 직후 동서 통합안 결정 #초기엔 고실업 등으로 조롱받아 #난관 뚫고 쏟은 통일 비용 효과 #동서 물질적 삶 차이 거의 없어져 #체제 경쟁보다 북 주민 삶에 초점 #한반도에도 꽃필 날 오게 노력을

당시 서독 총리였던 헬무트 콜은 동독이 가능한 한 빨리 ‘사회적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서독의 체제를 받아들인다면 동독에는 머지않아 ‘꽃피는 경관’이 펼쳐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콜 총리는 경제·화폐·사회 통합 방안의 도입을 알리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함께 노력하면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와 작센-안할트주, 브란덴부르크주와 작센주 그리고 튀링겐주에서 살맛 나고 일할 맛 나는 꽃피는 경관을 이른 시일 내에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1990년대 말엔 ‘유럽의 병자’ 불명예

통일 직전인 1990년 9월 콜 총리의 모습. 통일 이후 경제 격변으로 동독 주민들이 불안해 할 때 콜 총리는 ‘꽃피는 경관’이라는 밑그림을 그렸으며, 그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구상은 나중에 실현됐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통일 직전인 1990년 9월 콜 총리의 모습. 통일 이후 경제 격변으로 동독 주민들이 불안해 할 때 콜 총리는 ‘꽃피는 경관’이라는 밑그림을 그렸으며, 그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구상은 나중에 실현됐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콜 총리는 언제 그런 날이 올지 구체적인 시기를 못 박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배경에는 이전에 서독 경제부 장관과 총리를 지낸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주도하에 1948년 서독에서 실시했던 화폐 개혁과 사회적 시장경제의 도입에 따라 바로 시장이 힘을 얻고 지속적인 호황이 시작됐던 경험이 강하게 작용했던 것이 분명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기대와는 달리 연일 계속되는 동독 지역에서의 공장 폐쇄와 높은 실업률, 처리 비용만 수십억 마르크에 달하는 환경 폐기물의 지속적 출현,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시장의 붕괴 등 많은 악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꽃피는 경관’이란 슬로건은 바로 조롱의 대상이 됐으며 그 고안자였던 콜 총리를 공격하는 무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콜 총리는 자신의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1998년 총선에서 ‘꽃피는 경관’이라는 슬로건을 포스터에도 사용했다. 콜 총리는 그의 마지막 출마가 됐던 이 선거에서 패배했다. 복지국가 유지 비용에 통일 비용이 더해져 1990년대 말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성장률을 기록하며 ‘유럽의 병자’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그러나 동독에 쏟아 부어진 수십억 마르크의 투자는 헛되지 않았다. 괴를리츠와 바우첸, 크베들린부르크와 포츠담과 같은 중부 독일 도시들의 도심은 깔끔하게 복원됐다. 드레스덴의 옛 작센 왕국이 보유했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과 도자기, 보석 컬렉션은 얼마 가지 않아 옛 명성을 되찾았다.

폐기물 처리와 정비 작업은 시간이 더 오래 걸려서 거의 20년 가까이 소요됐지만 많은 환경재앙지역이 결국엔 다시 살 만한 곳들로 탈바꿈했다. 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례가 비스무트의 우라늄 광산 지역이다. 소련은 이곳에 ‘소련-동독 비스무트 주식회사’라는 특이한 형태의 회사를 만들어 원자력발전소와 원자폭탄 제조에 필요한 우라늄을 채굴하였으며 어마어마한 양의 오염된 폐기물 더미를 남겼다. 통일 이후 대규모 공공 정원을 새로 조성한 이곳에서는 2007년 연방정원박람회가 개최됐다.

헬무트 콜 총리의 기민당이 1998년 총선에 사용했던 ‘꽃피는 경관’ 홍보 선거 포스터. [사진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

헬무트 콜 총리의 기민당이 1998년 총선에 사용했던 ‘꽃피는 경관’ 홍보 선거 포스터. [사진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

동독 시절 사회주의 건축의 일환으로 대규모로 지어졌던 사각형 모양의 아파트들(플라텐바우텐)로 인해 흉물스럽게 변했던 대도시들의 외곽지역도 점차 조금씩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게 됐다. 일부 사각 아파트들은 예전의 단조로운 회색 대신에 산뜻한 색깔을 입혀 예쁘게 단장했고 나머지 사각 아파트들은 철거되기도 했다. 동독 시절 카를-마르크스-슈타트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통일 이후 본래 이름을 되찾은 켐니츠는 황량하게 넓었던 텅 빈 광장들을 대폭 줄여 주민 친화적인 도시로 탈바꿈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주민들에게서 나타났다. 무엇보다 평균 수명이 확 늘었다. 1989년 동독인의 평균 수명은 남성이 70세, 여성이 76세로 서독인보다 4년 이상 짧았다. 지금 독일인 평균 수명은 남성이 80세, 여성이 84세인데 동서독 지역 간의 격차가 거의 없다.

이렇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의료 환경 개선과 건강한 식생활 정착, 시장경제의 확대로 원활해진 물품 조달 등이 큰 몫을 했다. 식수나 배기가스, 건축 자재 등에 들어 있었던 환경오염물질들은 많이 줄어들었다. 작업환경 안전도가 높아졌으며 생산과정 자동화가 급속히 진행됐다. 광부 등 건강에 부담이 심한 중노동을 해야 하는 직업들은 감소했다.

또한 물질적인 삶의 질이 큰 폭으로 개선됐다. 통일과 함께 전 세계 모든 곳으로의 여행이 갑자기 가능해지자 많은 구동독 주민들은 가능한 한 빨리 여행을 하려고 애를 썼다. 1인당 주거 면적은 통일 이후 20년이 지나자 25% 넓어졌으며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자유를 상징하는 자동차 보유 대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대학생 수도 3배 이상 늘어났다. 동독 시절에는 같은 나이에서 약 15% 정도의 특별한 혜택을 받은 청소년들만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현재 대학 진학률은 40%가 넘는다.

북 노동당 규약, 냉전 말기 동독 연상

물론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들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특히 통일 즈음에 30세에서 50세 사이였던 동독의 중간 세대는 통일 이후에 일자리를 잃거나 정체성이 흔들리는 등 심리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사례와 비교해 보면 동독 지역에서의 전환으로 인한 충격이 상대적으로 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러시아 남성의 평균 수명은 69세에서 64세로 떨어졌다. 의료 서비스의 붕괴와 알코올 중독 그리고 수입의 감소가 그 원인으로 작용했다. 러시아 남성의 평균 수명은 2000년 이후에 다시 올라가기 시작해서 지금은 74세다.

구동독 지역에서는 서독으로부터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충격들을 완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은 매우 선별적이다. 통일 이후 되찾게 된 행복한 삶은 얼마 가지 않아 일상이 돼 버려 별것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게 됐다. 시간이 흐른 뒤 동독에 대한 향수 어린 기억을 아름답게 느끼면서 ‘그때 모든 것이 나쁜 것은 아니었어’라고 하는 말을 자주 듣게 됐다. 이 말에는 과거에 지나온 길과 관련된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러한 미화를 위한 ‘장밋빛 안경’은 현실을 직시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향후 남북한 사이에서도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게 될까? 통일 이전과 이후의 비교는 결국 냉전 시대의 체제 경쟁을 다루는 것과 같다. 동독은 처음에는 서독을 단순히 따라잡는 것이 아니라 능가하려고 했다. 이것이 성공하지 못하자 동독은 1972년 “독일은 더는 한 나라로 존재하지 않고 두 개의 국가로 존재하며 한쪽은 사회주의국가 그리고 다른 한쪽은 자본주의국가”라고 선언했다. 북한도 훨씬 성공적인 한국과의 비교로 인한 위험을 느끼고 있다. 북한은 지난 1월 노동당 규약을 변경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통일이라는 목표를 감추려 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사회주의 통치로 인한 결과가 민주적인 시장 경제와 비교하여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하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 사회주의로 인해 피폐해진 북한 주민들의 삶의 궤적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한다면 언젠가는 북한에도 ‘꽃피는 경관’이 이루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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