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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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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민족의 젖줄' 혹은 '대동맥'…. 한강이다. 고대사를 보면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나라가 항상 그 시대의 주인이었다. 격변의 현대사를 상징하기도 했다. 1980년대 말 대학가의 필독서였던 허영만의 만화 '오! 한강'은 국내 최초의 이데올로기 만화였다. 조정래는 2001년 현대사를 다룬 대하소설 '한강'을 발표했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우리 현대사는 분단의 강화 속에 경제발전을 이룩한 시대"라고 썼다. "충돌을 면할 수 없는 절대모순인 분단과 경제발전"의 두 얼굴을 한번에 보여주는 랜드마크가 바로 한강이다.

흑백사진으로 익숙한 동강 난 한강다리는 전쟁의 비극을 환기시킨다. 지금은 사라진 한강 백사장은 유명한 정치집회장이었다. '라인강의 기적'에 빗댄 조어 '한강의 기적'은 초고속 경제성장 신화를 뜻했다.

국가권력이 집중적으로 유포한 한강의 이미지는 주로 고도성장.산업화와 관련된 것이었다. 한강 개발은 근대화의 상징적 프로젝트였다. '한강의 기적'을 일군 박정희 정권은 섬과 백사장을 아파트 단지로 '개발'했다. 전두환 정권은 올림픽 유치 이듬해 '한강 종합개발' 사업에 들어갔다. 둔치가 시민공원으로 변했다. 동양 최고라는 63빌딩이 들어섰고, 유람선이 떠다녔다. 당시 정수라는 이렇게 노래했다. "하늘엔 조각 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아, 대한민국')

민주화 이후 한강에는 도시미학과 문화 개념이 추가됐다. 다리들은 아름다워졌고 현란한 야경이 대도시의 위용을 뽐냈다. 삭막한 시멘트숲 사이로 녹지가 들어섰다. 한강에 오페라하우스를 만들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한강은 고도 압축성장의 그늘을 말해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환경론자들은 한강 개발의 부작용으로 유속이 낮아져 '죽은 호수'가 됐고 생태계가 파괴됐다고 비판한다. 한강 다리는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투신이 잇따르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94년 성수대교 붕괴는 개발 만능과 압축성장의 병폐를 드러낸 한국형 대참사였다.

때마침 장안에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화 '괴물'도 한강을 무대로 한다. 괴물은 광화문 네거리나 초고층 빌딩 숲이 아닌 한강에 출현한다. 괴물이 끝내 한강을 떠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강은 영화의 한 테마다. 또 여기서 한강은 평소 우리가 보지 못했던 낯선 모습을 보여준다. 익숙한 공간을 전혀 새롭게 조망하면서, 덧붙여 괴물까지 나온다는 상상력. 역사에 짓눌렸던 한강이 문화적 상상력의 대상으로 도약하는 순간이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