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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플] "국부를 유출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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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캐피탈리스트인 나는 요즘 종종 ‘이하응 대감’을 생각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아들을 왕(고종)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혜안이 부족해 나라의 빗장을 걸어 잠궈버렸다.

팩플레터 119호의 요약본 #윤휘곤 칼럼 3회

금융과 자본시장 측면에서 한국은 지금도 흥선대원군에게 발목이 잡혀 있는 듯하다. ‘들어오는 돈’은 환영한다지만, ‘밖으로 나가는 돈’엔 보수적이다. 그런데 자본은 본디 한 곳에 머무르는 체질이 아니다. 사회주의 블락 붕괴 후 자본의 국가 간 이동이 더 활발해진 것도 있지만, 원래부터 이익을 위해서 어디로든 움직이는 게 자본의 속성이다. 요즘은 심지어 지구를 벗어나 화성까지 진출하려 하지 않나.

자본과의 ‘밀당’, 전세계 정부의 고민이다. 바꿔 말하면 그 속성을 잘 활용하는 게 국가의 능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글로벌 자본이 움직이는 판에서 한국은 왜 그렇게 국수적일까 싶다. 꽤 개방적인 영역도 많건만, 금융과 자본에서는 유독 소극적이다. 글로벌 자본의 흐름을 지켜보며 요즘 이런 생각이 부쩍 든다.

이하응 대감, 왜 아직도 우리를...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봤다. 아무래도 한국은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후 IMF 구제금융, 즉 국가부도 경험의 트라우마가 큰 것 같다. 스스로 결단이 아닌, 외부의 강요에 따라 금융시장을 개방했기에 자괴감과 피해의식이 컸다. 당시 사회 전체가 겪은 아픔이 컸기에 한국에선 자본의 해외 유출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강화돼 왔다. 해외로 자금을 가져가 해외 자산을 취득하면 그 자체로 파렴치범 취급을 받았다. 국부 유출죄였다.

그런데, 그렇게 유출된 국부가 과연 얼마나 될까. 개인의 해외 자산이 곧 국부는 아닐 테고, 국내에서 일어나는 외국환 거래 규모에 비하면 한참 적은 돈이다. 그럼에도 일부 부유층의 불법 해외자산 취득이 부각되며, 해외자산 취득 및 투자 자체가 좀 떳떳하지 못한 일로 취급됐다.

물론 불법 자본도피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혹시 내수에 투자해야 착한 돈이라는 시선이 자본의 해외진출을 지금까지도 가로막는 건 아닐까. 그런 우려에 갇혀 자본을 나라 안에 묶어두는 건 국부 증대에 도움이 될까.

바깥 세상은 지금 

자본이 움직이는 속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벤처캐피탈 시장을 한번 보자.

현존하는 수많은 벤처캐피탈(VC) 중 세쿼이아 캐피탈(Sequoia Capital)은 단연 세계 최고의 VC다. 1972년 실리콘밸리에 설립돼 애플·구글·오라클·야후·유튜브·페이팔 등에 투자한 명문 VC다. 국내서도 쿠팡·무신사·마켓컬리 등이 세쿼이아의 투자를 받았다.

그렇다면 어떤 VC가 세쿼이아 같은 세계 최고 수준 VC로 인정받을까. 투자수익률 같은 지표 외에, 요즘 글로벌 VC 업계에선 이걸 조건으로 본다. 실리콘밸리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최고의 VC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 중국에서 활발히 투자하고 중국의 성장에 올라타는 VC여야 세계 최고다. 이는 전세계 벤처캐피탈 시장을 미국과 중국이 양분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중국에 투자한 TOP 5 벤처캐피탈 중 3곳이 미국 기반이다. 세쿼이아, IDG캐피털, 매트릭스. 중국에 투입된 VC 자금 상당액을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투자사가 조달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들의 투자에서 국경은 의미가 없다. 미국 VC가 중국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중국 VC들은 동남아·미국·유럽 스타트업에 투자한다. 전세계에 오피스를 둔 중국의 힐하우스(Hill House Capital) 등이 좋은 예다.VC의 실크로드에 국경은 없다.

중국에 글로벌 자본이 들고나니, 글로벌 기업도 많이 나온다. 미국 양대 증시(NYSE, NASDAQ)에 상장한 외국 기업 총 738개 중 244곳(33%)이 중국 기업이다. 기업공개(IPO)로 상장한 297개 사 87곳(30%), 미국주식예탁증서(ADR*) 형태로 거래 중인 441개 사 중 157곳(36%)가 중국 기업이다. 이중 시가총액 100조원 이상 기업이 알리바바를 포함해 3개나 된다. 중국 1위 승차공유업체 디디추싱 역시 뉴욕 증시 상장을 준비 중이다.
*미국주식예탁증서(ADR) 기업 : 한국에 상장된 기업이 미국 증시에서 주식예탁증서를 발행해 주식을 거래하는 경우.

미국 증시에 상장한 한국 관련 기업은 쿠팡Inc(NYSE 상장)이 유일하다. ADR을 통해 거래되는 한국 기업 9개는 대개 대기업 계열사나 금융사다. 벤처가 성장해 미국 증시에 상장한 경우가 아니란 얘기다. 이게 무슨 뜻일까. '한국도 충분히 큰 시장인데 왜 굳이 외국 상장하냐', '그 기업 국적이 한국이냐 미국이냐 일본이냐', '창업자 국적은 어디냐' 등을 우리끼리 따져 묻지만, 의미없는 논쟁이다. 우리가 그러는 사이 전세계 금융의 중심 미국 증시에서 중국 기업들은 주류로 대접받고 있다.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한국의 존재감이 미약한 현실에 VC로서 느끼는 아쉬움은 이런 것이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한국의 자본은 여전히 내향적이고 내수 중심이라는 것이다. 최근 들어 해외 투자에 관심 보이는 VC가 늘어난 것은 다행이지만 대다수는 조합의 자금과 투자 대상 모두 국내에 그치고 있다. 투자할 곳이 없어서? 돈이 적어서?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한국의 가장 큰 연기금인 국민연금을 보자. 운용 총 자산이 작년 말 기준 834조원이고, 그 중 43%가 주식이다. 2021년 해외주식 비중 목표는 전체 운용자산의 25%. 국민연금은 십수년 전만 해도 대부분 국내 투자만 했으나 점차 해외 자산 비중을 높였다. 그러나 해외 연기금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세계에서 가장 큰 연기금인 노르웨이 국부펀드 NBIM(Norges Bank Investment Management)는 약 1500조원 자산을 운용한다. 이중 주식이 72%인데, 69개 국에 투자한다. 주식투자 비중이 커 보이지만 여러 나라에 분산 투자하니 리스크 회피도 상당히 잘 한다. 분산투자가 가능하다는 것은 정보와 지식에 더해 용기까지 있다는 얘기다. 세계 5대 연기금에 속하는 한국의 국민연금도 이렇게 못할 이유가 없다.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탈, 자본시장에서 활약하는 증권사와 투자은행, 그런 금융시장에 투자하는 연기금, 모두 한국이라는 협소한 시장에만 머물러 있어도 괜찮을까. 이들의 존재 이유, 즉 '수익을 내는 데  문제가 없겠느냐'는 질문이다.

돈이 돈을 벌어오게 하라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는 한국 기업이 점차 늘어나는 만큼, 금융 시장도 그에 걸맞게 성장해야 한다. 무엇이 스스로를 위축시키는지부터 냉정히 살폈으면 한다. 규제나 제도 때문인지 아니면 해외로 자본 유출하면 도둑놈 소리 듣는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따져보자. 행여 그런 두려움 때문이라면 이제라도 ‘서학개미’의 용맹무쌍함을 배워야 한다.

국내 주식투자 인구의 3분의1에 해당하는 320만여 명이 해외 주식투자 계좌를 가졌다고 한다. 개인 직접투자의 위험도를 얘기하자고 들면 상당히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그들이 용감하게 아마존·테슬라·애플·페이스북·엔비디아·ASML·구글·알리바바 등 개별 종목에 직접 투자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한국 주식시장의 비이성적 출렁임, 부동산 투자 기회의 제약 때문에 시선을 밖으로 돌렸고 실행에 옮겼다. 합리적이다.

이제는 금융 시장 주체들이 나설 때다. 글로벌 규모로 성장하는 전세계 유니콘 기업의 IPO 로드쇼에 한국 기관투자자들은 초대받고 있는가(초대받을 수 있어야 한다). 대규모 SPAC* 상장의 PIPE(Private investment in public equity)에 참여해달라는 권유는 받고 있는가(받을 수 있어야 한다). 글로벌 자본 시장에서 당당히 이름을 날리는 선수들이 늘어나길 바란다. 코로나19 방역에서 글로벌 모범을 보여줬고 제조업과 무역에서 여전히 선두 주자이듯, 이제는 자본과 금융시장에서도 선두로 치고 나가야 한다.
*SPAC(Special Purpose Acquisition Company) : 기업인수목적회사. 특정 기업 인수합병, 우회상장을 목적으로 하는 회사. SPAC이 특정 기업을 인수할 때 특정 투자자들(PIPE)에게 주식을 팔아 부족한 자금을 조달하기도 한다.

이제는 돈이 나가서 돈을 벌어 와야 한다. 그래야 나라 안에 돈이 돌고 성장 기회가 는다. 50년 전에는 사람이 나가서 돈을 벌었다. 중동 건설 붐에서 그랬다. 그 후에는 제품을 내보내 돈을 벌었다. 수출입국은 한국경제 성장의 절묘한 전략이었다. 사람과 제품은 여전히 한국 경제의 양대 아웃바운드(outbound)다. 앞으로 하나 더 추가했으면 한다. 돈이 나라 밖으로 나가야 한다. 자본을 유출하고 해외에서 과감하게 투자하자. 미래를 위해 더 과감하게 국부를 유출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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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지난 6월 24일 팩플레터 구독자들에게 발송된 팩플레터 119호의 요약본 입니다. 레터를 구독하시면 요즘 핫한 테크기업 소식을 입체적으로 뜯어보는 ‘기사 +α’가 찾아갑니다. 구독신청 → https://url.kr/fact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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