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량청, 의화단 사건 배상금 반환 대미 협상서 ‘묘수’ 제안

중앙선데이

입력 2021.06.26 00:21

지면보기

742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2〉

미국 여류화가 캐서린 칼이 그린 즈시의 초상. [사진 김명호]

미국 여류화가 캐서린 칼이 그린 즈시의 초상. [사진 김명호]

1904년 말, 미 국무장관 존 헤이가 중국 주미공사 량청(梁誠·양성)을 국무부로 불렀다. “미국은 금본위 국가다. 그간 은으로 지급하던 경자년 배상금을 황금으로 지급하기 바란다.” 량은 대통령의 뜻이라고 직감했다.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약육강식을 신봉하는 골수 다윈주의자였다. 뉴욕주 지사와 부통령 시절 자주 하는 말이 있었다.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없는 국가는 존재할 자격이 없다.” 대통령이 되자 생각을 바꿨다. 영토 침탈보다 국가 이익에 치중했다.

“미 유학할 중 청년 양성 위해 쓸 것”
량의 제안, 미 지식인들 사로잡아
뉴욕타임스 등 언론도 중에 우호적

중의 미 철도 운영권 회수로 갈등
미는 배화법으로 중 노동자 추방

량청은 노련한 외교관이었다. 헤이에게 평소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배상금을 황금으로 요구하면 중국은 증세(增稅) 외엔 방법이 없다. 부담이 늘어나면 중국인의 양인(洋人)에 대한 증오가 증폭된다. 무슨 소란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힘들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몸을 한차례 추스른 헤이가 적막을 깼다. “경자년 배상금은 우리가 입은 손실에 비해 과했다.” 량은 머릿속이 번쩍했다. 외교부에 전문을 보냈다. “미국 정부는 중국에 요구한 경자년 배상금이 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미국과 반환 교섭을 시작하자.”

미, 은 대신 금으로 배상금 지급 요구

공사관 도서실에서 관원들과 미국의 경자년 배상금 초과액 증거자료를 찾는 량청(오른쪽 둘째). [사진 김명호]

공사관 도서실에서 관원들과 미국의 경자년 배상금 초과액 증거자료를 찾는 량청(오른쪽 둘째). [사진 김명호]

량청은 더 이상 금으로 하건 은으로 하건, 결산 문제로 끙끙대지 않았다. 39년간 미국에 지불해야 할 배상금이 의화단에게 입은 손실액을 초과했다는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 언론계에 미국 유학 시절 친구들이 많았다. 매일 밤 중국 공사관저에 기자들을 초청했다. 뉴욕타임스가 미국 측 손실이 실제와 달랐다는 기사를 큼지막하게 내보냈다. 힘을 얻은 량은 조야의 정치인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공사관보다 국회에 가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중국 지지 여론이 형성될 무렵,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중·미 양국이 광저우(廣州)에서 한커우(漢口)까지 연결한 철도 운영권을 중국이 회수하자 미국이 발끈했다. 대통령 루스벨트는 중국의 주권은 인정하되 이익은 양보하지 않았다. 배화법(排華法)을 발동, 중국 노동자들을 미국에서 내쫓았다. 중국은 대규모 미국 상품 배척운동으로 응수했다. 여론 조성에 분주하던 량은 숨을 죽였다.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황태후 즈시(慈禧·자희)도 특유의 수완을 발휘했다. 세인트루이스 만국박람회에 청나라 정부 명의로 중국촌과 중국관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미국공사 부인 사라 콩거를 불렀다. 여 화가를 한 명 소개해 달라며 용건까지 설명했다. 미국 화가 캐서린 칼의 회고록 서문 일부를 소개한다. “1903년 4월, 나는 상하이에 있었다. 도시 풍경 화폭에 옮기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루는 베이징 주재 미국공사 부인 콩거 여사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베이징에 와서 세인트루이스 만국박람회 중국관에 전시할 즈시 태후의 초상을 그릴 의향이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콩거 여사는 태후를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미국인들의 태후에 대한 편견이 내가 그린 초상을 보고 바뀌기를 희망했다.” 칼은 흥분했다. 간절히 원한다는 답장을 보냈다.

배상금 반환 후, 미·중 양국은 군사 교류를 시작했다. 1911년 미국을 방문한 중국 해군 수병들. [사진 김명호]

배상금 반환 후, 미·중 양국은 군사 교류를 시작했다. 1911년 미국을 방문한 중국 해군 수병들. [사진 김명호]

상하이는 무더웠다. 칼은 하루에 다섯 번 목욕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연락 오기를 기다렸다. 콩거 부인이 보낸 편지 받고 맘이 놓였다. “태후가 화가 만날 준비에 들어갔다. 주변에서 길일(吉日) 택하느라 분주하다.” 중국 관원들은 동작이 느렸다. 콩거 부인은 7월이 돼서야 외교부에서 보낸 문서를 칼에게 보냈다. “콩거 부인에게 청한다. 8월 5일 미국 화가 대동해 입궁해라.” 이허위안(頤和園)에서 즈시를 만난 칼은 순친왕의 왕부에 머무르며 초상을 완성했다.

박람회 중국관 정면에 걸린 즈시의 실물 초상을 본 미국인들은 화려하고 단정한 귀부인의 자태에 넋을 잃었다. 흉물스럽고 기괴하리라 여겼던 종래의 인상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박람회가 끝난 후 청나라 정부는 즈시의 초상을 루스벨트에게 선물할 특사를 미국에 보냈다. 루스벨트는 정중한 접수 의식을 거쳐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수장하라고 지시했다.

몇 개 월 후,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가 관광차 중국에 왔다. 소식을 접한 즈시는 직접 접견하고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밥도 같이 먹고 이허위안도 함께 산책했다. 앨리스는 자신의 눈에 비친 태후의 인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중간 정도의 신장에 치파오 걸친 모습이 수려하고 장엄했다. 대국 통치자의 풍모가 넘치는 걸출한 여성이다.” 즈시의 앨리스 환대는 중·미 관계 완화에 영향을 끼쳤다. 1905년 6월 루스벨트가 국무원에 지시했다. “경자년 배상금 반환 교섭을 재개해라.”

청 황태후 초상, 미 박람회장에 전시

한동안 엎드려있던 량청도 기지개를 켰다. 1906년, 미국 정부에 정식으로 배상금 반환을 요구했다. 미국은 신중했다. 반환금이 부패한 중국 관리들의 주머니에 들어갈 것을 우려한다는 메시지를 량에게 전달했다. 량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응했다. “반환금은 일단 중국에 보내라. 우리는 교육기관을 설립해 미국 유학 보낼 청년들을 양성하겠다.”

량청의 제안에 미국 정부가 고개를 끄덕일 무렵 앨리스의 결혼이 임박했다. 즈시는 명품 견직물로 만든 의상 한 상자와 비단을 량에게 보냈다. “앨리스의 결혼 선물이다. 직접 전달해라.” 백악관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하객들은 중국의 귀부인 같다며 신부에게 갈채를 보냈다. 즈시의 간단한 외교는 루스벨트의 배상금 반환을 촉진시켰다.

량청의 제안은 미국 지식인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배화법에서 허우적거리는 정부의 대 중국 전략을 수정하자는 명망가들이 한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리노이 주립대학 총장이 루스벨트에게 교육시찰단을 중국에 보내자는 제안서 말미에 이런 내용을 삽입했다. "중국 청년을 교육시키겠다고 나설 나라가 과연 있을까? 정신이 뒷받침되는 사업이라야 국가에 이익이 된다. 정신의 지배를 받는 상업은 강력한 군사력보다 국민을 안심시킨다.”

중국 경험이 풍부한 선교사들은 교회 학교 설립에 기대가 부풀었다. 루스벨트에게 배상금 반환을 촉구하는 서신이 줄을 이었다.  〈계속〉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