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실컷 워킹그룹 탓하더니…정부 "면제 받아와도 北호응 안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 시절 남북 교류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제재 면제를 받아왔지만 "대부분이 북한이 호응하지 않아 불발됐다"고 밝혔다. 앞서 정부는 지난 21일 제재 면제를 논의하는 한ㆍ미 간 협의체인 '워킹그룹'을 폐지한 데 대해 "워킹그룹은 곧 대북 제재라는 인식" 등을 이유로 들었는데, 막상 남북 사이 걸림돌은 제재 자체도, 제재 면제가 제대로 안 이뤄진 것도 아닌, 북한의 변심이었다고 확인한 셈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연합뉴스

외교부는 2018년 11월부터 2020년 2월까지 12차례의 한ㆍ미 워킹그룹 회의에서 승인된 사업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이유를 묻는 국민의힘 조태용 의원 질의에 "사업 대부분은 북한 미호응으로 이행되지 못했다"고 24일 밝혔다.

외교부 "워킹그룹서 면제 받은 사업 대부분 北이 미호응" #최종건 "워킹그룹은 곧 제재라는 인식...폐지는 대북 시그널" #"제재, 워킹그룹보다 북한의 변심이 문제" 지적도

외교부는 "정부는 남북협력사업 추진 과정에서 제재 면제 필요 시 한ㆍ미 워킹그룹 등 양국 간 협의를 거쳐 신속하고 원활하게 제재 면제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며 그 성과로 "철도ㆍ도로 연결조사, 철도ㆍ도로 연결 및 현대화 사업 관련 착공식, 공동 유해발굴 사업, 이산가족 화상상봉 장비, 만월대 공동 발굴, 양묘장 현대화 사업 등"을 꼽았다.

그러나 한ㆍ미가 워킹그룹을 거쳐 제재 면제를 받아낸 남북교류사업의 대부분은 실제 이행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10여건의 제재 면제(라이센스)가 나왔는데 이 중 실제 이행은 4분의 1 수준에 그쳤다. 그 원인에 대해 워킹그룹 주무부처였던 외교부도 본질적인 원인을 "북한의 미호응"이라고 보고 있는 셈이다.

한ㆍ미 워킹그룹 관련 외교부가 조태용 의원실에 제출한 답변 중 일부. 국민의 힘 조태용 의원실.

한ㆍ미 워킹그룹 관련 외교부가 조태용 의원실에 제출한 답변 중 일부. 국민의 힘 조태용 의원실.

일례로 2019년 정부는 북한에 독감 치료제인 타미플루를 인도적 지원 차원에서 보내려 했지만 불발됐다. 트럭이 타미플루를 싣고 북측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특정 물품의 '이전(transfer)'을 막는 대북 제재 조항에 저촉됐다. 이에 정부가 운송수단인 트럭이 북측에 완전히 이전되는 게 아니라, 북측에 잠시 갔다 다시 남측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제재의 예외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미측을 설득했다. 이에 미측도 '이전'의 개념을 예외적으로 바꿨다. 하지만 막상 제재 면제가 이뤄지고 나자 북측은 타미플루의 성능 등을 문제 삼으면서 받지 않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유엔사가 트럭 반입을 애초에 막은 뒤 제재 면제까지 일정 시간이 걸린 측면이 있지만, 이는 워킹그룹 때문이 아닌 어디까지나 기존의 대북 제재 때문이란 지적이 나왔다.

2019년 5월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이도훈 당시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스티븐 비건 당시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한ㆍ미 워킹그룹 회의에 참석한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2019년 5월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이도훈 당시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스티븐 비건 당시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한ㆍ미 워킹그룹 회의에 참석한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하지만 국내에선 여권을 중심으로 2019년 말부터 남북 간 사업이 차질을 빚는 데 대해 한ㆍ미 워킹그룹을 사실상의 희생양으로 삼는 듯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지난 2019년 10월 박병석 당시 민주당 의원은 외교부 국정감사에서 "바로 워킹그룹 유엔사가 '반출에 따른 차량이 문제다'에 제재를 걸었다"며 "2개월 동안 재지연되면서 북한이 돌아가면서 그때부터 남북관계가 결정적으로 깨지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엔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북한 개별관광 등 남북 협력 구상을 밝히자 해리 해리스 당시 주한미국대사가 바로 이튿날 외신 기자 간담회에서 "향후 제재를 촉발할 수 있는 오해를 피하려면 한ㆍ미 워킹그룹을 통해 다루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주한미국대사가 대통령의 발언 직후 딴지를 놓는 모양새라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이후 송영길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이 "대사가 무슨 총독인가"라고 비판하고,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내정간섭 같은 발언"이라고 비난하면서 더 큰 외교적 결례 논란이 일었다.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수석부의장도 지난해 6월 김연철 당시 통일부 장관이 사의를 표명한 데 대해 "물밑에서는 노력을 했지만 한ㆍ미 워킹그룹의 장벽을 넘지 못한 고충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며 "사사건건 벽에 부딪히니까 좌절감을 많이 느낀 것 같다"고 말했다.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성 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21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한ㆍ미 북핵수석대표 협의를 하기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성 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21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한ㆍ미 북핵수석대표 협의를 하기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한ㆍ미가 성 김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의 방한을 계기로 열린 21일 북핵수석대표 협의에서 결국 워킹그룹의 종료에 합의한 뒤에도 정부는 워킹그룹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했다.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은 22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워킹그룹은 곧 (북한에 대한) 제재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의제를 넓혀 포괄적으로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워킹그룹 폐지가) 당연히 북한에 시그널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다만 정부 스스로 '남북 협력 중단은 워킹그룹 때문이 아니다'라면서도 워킹그룹 폐지가 북한에 유화 시그널이 될 것이라고 보는 것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최 차관의 발언 약 1시간 30분 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담화를 내고 미국을 향해 "스스로 잘못 가진 기대는 자신들을 더 큰 실망에 빠뜨리게 될것"이라고 밝혔다.

관련기사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