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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지저귀고 빗소리 나는 악기 연주, 수목원 같은 무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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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1호 18면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작곡가 겸 음악감독 이진욱

이진욱 음악감독은 “수목원에 바람쐬러 오는 느낌으로 공연장에 와달라”고 전했다. 신인섭 기자

이진욱 음악감독은 “수목원에 바람쐬러 오는 느낌으로 공연장에 와달라”고 전했다. 신인섭 기자

소리가 주인공인 연극이 나온다. 이머시브 사운드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22일~7월 4일)다. 실험적인 작품을 위해 지어진 세종문화회관의 블랙박스 공연장 S씨어터의 기획 시리즈로, 2019년 ‘김주원의 탱고발레’, 2020년 ‘김설진의 자파리’에 이어 올해는 사운드를 주역 삼았다. 새들의 소리를 최초로 악보에 담은 음악가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기 위해서다.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정원의 모든 소리가 ‘주인공’ 역할 #스피커 60개 동원해 사운드 디자인 #인상주의 회화 보듯 감각적 경험 #“오래된 것들이 주는 정취 소중해”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원작자 파스칼 키냐르의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 19세기 후반 미국 성공회 사제였던 시미언 피즈 체니가 죽은 아내가 가꾼 정원의 모든 소리를 악보에 옮기며 사랑과 그리움을 승화시키는 이야기다. 소극장에 스피커 60개를 동원해 사운드를 디자인하고, 벨기에에서 이끼까지 공수해 실제 정원 같은 감각을 조성한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음악적, 감각적 실험이다.

주인공 ‘사운드’를 위해 지금 세종문화회관 연습실에서는  대배우 정동환까지 나서 피아노 연주에 도전하고 있다. 형체 없는 주인공의 배후에 있는 건 음악감독 이진욱(41)이다. 제1회 한국뮤지컬어워즈 작곡·음악감독상을 수상한 뮤지컬 작곡가 겸 음악감독이자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는 우연히 소설을 먼저 읽고 영감이 떠오르던 차에 섭외를 받았다.

“친구가 저와 어울린다며 책을 선물했어요. 제가 천주교 신자인데, 명동성당에서 밤 9시 미사를 보고 돌아가는 버스에서 읽기 시작했죠. 잔잔한데 울림 있는 문장들이 마치 인상주의 그림 같은 잔상이 남아서 막연히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실제 공연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가 책에서 떠올린 이미지는 십여 년 전 여행한 파리였다. 늦은 오후 몽마르뜨 언덕에서 본 해가 기울어지는 순간, 오르세미술관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종일 바라보던 날들, 그 풍경과 공기, 주변 사람들까지 살아나는 느낌이었다고. “학교에서 과제를 할 때도 드뷔시, 라벨 같은 프랑스 음악에 관해서만 썼어요. 이 작품을 만나 잊고 살던 제 취향들을 떠올리게 됐죠. 예전에 프랑스 친구들이 ‘멜랑콜리’를 이해하느냐며 ‘밝음과 어둠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나눠진 게 아니다. 그 중간 모서리에 모든 게 담겨 있다’고 한 말이 참 좋았거든요. 밝으면서 슬픈 듯한 프랑스 예술의 정서를 이해한 것 같아서요.”

‘다성의 칸타타, 장중하고 순화된 가곡, 영원한 사랑의 찬가’라는 프랑스 주간지 텔레라마의 평처럼, 소설을 읽다 보면 왠지 작가 키냐르가 글을 악기처럼 다룬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한 작가는 음악과 문학을 떼어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저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알고보니 작가의 부모님 한 분은 음악가, 한 분은 언어학자더군요. 음악이 자연스럽게 내재화된 작가인데, 독특한 자기만의 단어를 만드는 것에서 언어의 한계를 넘어 예술적으로 다른 세계로 가고 싶어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음악도 언어고, 언어도 언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달까요.”

그래서 창작진이 설정한 작품의 종착지는 “배우들의 대사조차 음악이 되는 것”이다. “뮤지컬 작곡과는 많이 다른 작업이었어요. 기승전결을 듣고 감동하는 게 아니라, 두 마디만 들어도 반짝이는 음악을 만들고 싶어서죠. 드뷔시가 바다의 반짝임만으로 곡을 쓴 것처럼요. 정동환 선생님의 ‘정말 행복했어’라는 대사에 맞춰 음악 한 소절을 얹는 식이죠. 현실적으로 말과 음악은 다르지만, 말과 음악이 같은 선상에서 주고받는 대사가 되도록 붙여보려고 애썼어요.”

이진욱은 실제로 시미언이 기보한 『야생 숲의 노트(wood notes wild)』(1893)를 기반으로 현대음악 작곡가인 올리브 메시앙의 ‘검은 티티새’ 등을 재해석해 작곡했다. “사실 시미언 이전에도 많은 작곡가들이 자연을 악보로 옮기려는 시도를 했거든요. 비발디 ‘사계’도 이탈리아 자연의 변화를 담은 건데, 시미언의 차별점은 자연 안에서 구체적인 대상들을 음표화한 것이죠. 이후 많은 음악가들이 그런 식의 접근을 했고요.”

사실 『야생 숲의 노트』는 당대 음악가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자연의 멜로디를 인간 음계에 억지로 편입시켰다고 비난받았다. 하지만 이진욱은 “시미언의 기억 안에 있는 세계관 속의 음악일 것”이라고 했다. 아내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아내를 둘러싼 과거의 순간을 총체적 감각으로 기억하려는 노력이란 것이다. 소극장에 스피커 60개를 동원하는 이머시브 사운드 효과와 벨기에산 이끼, 공연장 로비를 수목원 향기로 채워 넣는 것도 그래서다.

“스피커 60개가 새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가는 소리, 발자국이 다가오는 소리까지 재현할 거예요. 수목원에, 자연 속에 와 있는 느낌을 드리고 싶어서요. 음악은 듣고 영화는 보는 것이라면, 앞으로 공연 예술의 지향점은 내가 그 장소에 있는 것처럼 직접적인 경험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고 자연의 소리를 여과 없이 들려주는 건 아니다. 악기로 음향을 만드는 ‘사운드 디자인’을 거쳐 음향과 음악의 일체화를 추구한다. 예컨대 플루트의 음을 받아 사운드가 커지면서 환상적인 순간으로 들어가고, 빠져나오면서 다시 음악으로 돌아오는 식이다. 라이브 음악을 담당하는 건 피아노와 첼로, 바이올린과 플루트의 4중주. 내레이터 역의 김소진과 시미언 역의 정동환도 무대 위에서 직접 피아노를 친다. “김소진 배우는 전문 연주자들과 앙상블이 가능할 정도예요. 정동환 선생님은 한 음만 치셔도 그분의 역사가 울려 퍼지는 듯한데, 대배우만이 줄 수 있는 느낌 같아요. 레슨 때도 ‘여긴 이렇게 치세요’가 아니고 ‘작고 소중한 새를 다루듯이 해달라’고 하면 그 소리를 만들어내시는데, 감탄이 나오더군요. 피아노건 뭐건 감정의 매개가 달라질 뿐이지 그분의 연기 인생이 표현되는 건 똑같은 것 같아요.”

중앙SUNDAY 유튜브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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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굳이 ‘멜랑콜리’를 언급했듯, 원작은 제목이 주는 따뜻한 느낌을 진한 슬픔으로 배신하는 글이다. 음악으로 치면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기대했다가 베토벤의 ‘비창’을 만난 느낌이랄까. 하지만 음악과 연기로 재해석된 공연의 느낌은 또 다를 것이란다. ‘슬픔은 불행이 아니라 불행을 치유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고단한 삶을 치유해주는 무대가 될까.

“요즘 빈티지 가구에 꽂혀있는데, 이 소설을 읽고 60년대 잉글랜드에서 온 탁자 스탠드가 제게 말을 거는 느낌을 받았달까요. 오래된 바구니에서 찾아낸 보석 같은 느낌? 물건이든 뭐든 오래된 것들이 주는 정취가 있잖아요. 지금이 K팝 아이돌 세상이라고 해도, 예전 역사를 살았던 사람들의 산물도 소중한 것 같아요. 이 공연도 그런 느낌이었으면 합니다.”

유주현 기자 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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