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조를 ‘모던 전통’ 춤으로 표현…“한국무용 과감해져야”

중앙선데이

입력 2021.06.12 00:20

업데이트 2021.06.14 17:35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전방위 아티스트 정구호

먼 훗날 돌아보면 2010년대 한국무용계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기록될 사람은 무용인이 아닐 것 같다. 어딘지 촌스러웠던 한국춤은 그가 손을 대자 세련된 속살을 드러냈고, 티켓이 팔리기 시작했다. 2012년 ‘단’을 시작으로 ‘묵향’ ‘향연’ 등 그가 연출한 국립무용단 공연들로 인해 한국무용은 환골탈태했고, 국내외에서 호평받으면서 이미지와 방향성까지 달라졌다. ‘전방위 아티스트’라 불리는 패션 디자이너 정구호(59) 얘기다.

국립무용단 ‘산조’ 연출
변화무쌍 우리 음악, 시각화 도전
“한국무용계 빨리 세대교체 돼야”

디자이너 겸 비주얼 마스터
4차 산업혁명 디지털 전환 관심도
“잡스처럼 좋은 영향 미치고 싶어”

‘한국무용 최고의 티켓파워’가 된 그가 ‘춘상’(2017) 이후 4년 만에 국립무용단에 돌아왔다. 이번엔 우리 음악의 고유한 양식인 ‘산조’의 시각화에 도전한다. 그간 합을 맞췄던 원로급이 아니라 젊은 안무가인 최진욱(경기도무용단 상임안무가)·임진호(고블린파티)와 함께하는데, 자신의 목표에 부쩍 가까워진 야심작이란다. “한국무용을 시작할 때부터 현대와 전통이 반반으로 만나는 ‘모던 전통’ 장르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서두르면 받아들이기 어려울 테니 크레딧을 쌓아가며 때를 본 건데, 지금이 과감해질 시점인 것 같았어요. ‘산조’라는 콘셉트를 정한 것도 그래서죠.”

삼성미술관 리움 재개관도 자문

24~26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되는 국립무용단 ‘산조’는 최진욱·임진호 안무가가 움직임을 만들었다. [사진 국립무용단]

24~26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되는 국립무용단 ‘산조’는 최진욱·임진호 안무가가 움직임을 만들었다. [사진 국립무용단]

그는 자칭 산조 매니어다. 하지만 불규칙하고 즉흥적이며 변화무쌍한 기악 독주 형식을 무용 음악으로 쓰자는 그의 제안에 선뜻 공감하는 무용가는 없었다. “산조를 들을 때마다 키스 자렛의 피아노 변주처럼 아방가르드하고 컨템포러리한 요소를 느끼거든요. 들을수록 궁금해지는 음악이랄까. 과거에 즉흥에 가깝게 만들어져서 지금껏 흘러온 산조를 지금 위치에서 재해석한다면 어떨까. 그런 음악에 대한 챌린지와 그걸 무용으로 표현하는 실험을 시도하는 거죠. 젊은 안무가들이 확실히 도전에 두려움이 없더군요.”

음악뿐 아니라 춤 자체도 결이 달라졌다. 전작들이 전통을 세련되게 디스플레이하는 접근법이었다면, 이번엔 움직임이 전통의 무게를 벗었다. ‘조리법은 한식인데 푸아그라 같은 재료를 쓴 요리’ 랄까. “제 작품을 보셨던 분들은 이 정도 챌린지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요새 ‘범 내려온다’만 봐도 한국적 장단이지만 움직임은 다르잖아요. 우린 그보다는 좀 심각한데, 확실히 젊은 안무가들이라 재치 있는 동작이 많아요. 어떤 장면은 제가 봐도 너무 가벼워서 처음으로 좀 무겁게 가자고 제안했죠. 선생님들께는 항상 좀 가볍게 하자고 했었는데, 내가 나이가 들었나 싶기도 하고.(웃음) 그런 변화가 재밌더군요.”

사실 ‘산조’의 탄생엔 비하인드가 있다. 2019년 거장 국수호와 함께 만들던 ‘색동’이 국립무용단의 내홍으로 취소됐고, 홀로 남겨진 정구호가 젊은 안무가들과 색다른 조합을 꾸린 것이다. “사실 큰 계획 중의 하나였어요. 원래 ‘색동’까지만 원로를 모신 다음 새로운 세대와 현대적인 작업을 하려고 했었죠. 원로들은 평생 지켜온 고집을 지키는 게 맞고, 젊은 안무가들은 도전하는 게 맞으니까요. 무용계는 빨리 세대교체가 돼야 해요. 이번에도 어르신들이 뭐라 하실지 주변에서 걱정이 많은데, 지금 한국무용은 새 인물 새 도전이 필요한 때거든요. 젊은 무용가들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기 위해 더 과감한 도전을 해야죠. 선생님들 눈치 보지 말고.(웃음)”

‘산조’의 연출 및 무대, 영상, 의상 디자인을 맡은 정구호. [사진 국립무용단]

‘산조’의 연출 및 무대, 영상, 의상 디자인을 맡은 정구호. [사진 국립무용단]

요즘 젊은 안무가들의 가장 큰 고민은 한국무용이라는 정체성과 대중성 사이의 균형일 터다. 하지만 ‘최고 티켓파워’는 “그런 고민은 필요 없다”고 일축했다. “‘범 내려온다’ 이후에 그런 고민을 많이 할 테죠. 근데 저는 대중성이 아니라 관객 이해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현대무용을 할 땐 항상 어렵단 얘기를 들었는데, 반대로 한국무용은 식상해 하더군요. 그래서 어려운 것과 식상한 것을 접목해서 새로운 장르로 만들자는 생각을 했는데, 다행히 반응이 온 거죠. 젊은 분들이 하고 싶은 걸 깊이 있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그런 분들에게 기회가 많아져야죠. 나랏돈으론 역부족이고, 여유 있는 분들의 관심과 기여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최근에 구찌가 한국문화를 오마주 했던데, 대단하다 생각해요. 다른 브랜드는 한국에서 돈만 벌어가잖아요. 기왕이면 거기서 멈추지 말고 한국문화에 더욱 인볼브해서 한국무용 프로젝트까지 한다면 좋지 않을까요.(웃음) 그 정도는 여기서 벌고 있거든요.”

무용뿐 아니다. 정구호는 브랜드·공간·공연·전시에 걸쳐 전방위 비주얼 마스터다. 국립오페라단 야외오페라 연출, 파라다이스 호텔 아트스페이스 예술감독, 롯데백화점 리뉴얼 총괄, 최근엔 신인가수 앨범 아트 디렉팅까지, 일일이 열거하는 게 구차할 정도다. 지금은 패션기업 인디에프의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7월부터 9월 사이 4개의 신규 브랜드 론칭을 동시에 준비 중이고, 삼성미술관 리움 재개관까지 자문하고 있다. “리움을 연 지 꽤 됐으니, 오래된 걸 정리하는 정도죠. ‘리움’하면 대중에게 아주 친숙한 뮤지엄은 아닌데, 좀 접근하기 좋은 이미지로 변화를 꾀하더군요. 그러기 위한 여러 요소를 만들고 있어요. 예컨대 뮤지엄 스토어가 뉴욕 MoMA처럼 아주 멋지게 바뀔 겁니다. 올해 안에는 가볼 수 있겠죠.”

늘 대형 사업의 러브콜을 받으니 대단한 수완가인가 싶지만, 자칭 “형광등”이다. ‘인생 흑역사’로 꼽는 평창 올림픽 개·폐막식 총연출 사퇴도 계약에 어설프고 정치에 어두워 벌어진 일이다. “계약도 안 해주는 상태로 계속 일을 하라고 하니 못 버티겠더군요. 하도 괴로워하니까 누군가 해결해 줄만한 분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는데, 하늘의 뜻인지 생애 최초로 약속을 잊어버렸어요. 직후에 그분이 구설에 오르더군요. 안 그래도 억울한데 그때 만났으면 더 억울할 뻔했어요.(웃음) 밀라노에서 공예프로젝트를 할 때도 한창 설치 중에 정치인 전화를 받았죠. 자기가 추천한 작품을 메인 전시장에 안 놨다고 불만이길래 나를 총감독으로 임명했으면 믿고 맡기라고 끊어버렸는데, 뒤늦게 오싹하더군요.(웃음)”

일에 몰두해 연애 못 하는 ‘한계’

수많은 창작 작업을 동시다발로 진행하면서도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은 식지 않는 호기심이다. 새로운 게 눈에 띄면 헤집고 다녀야 하는 체질이고, 그러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솟아 나온다는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의 최종 작업으로 하고 싶은 게 있어요. ‘관계설정’이라는 프로젝트인데, 오페라와 굿을 섞는 달지, 여러 장르를 하나로 묶어 새로운 형태로 포맷팅하는 작업이에요. 그런 구상을 잔뜩 해 놨는데, 뭐가 되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에요. 오롯이 내 생각을 100% 표현하고 싶을 뿐이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디지털 전환에 대한 관심도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 이미 십여 년 전에 다양한 시점이 가능한 무용 영상 제작을 검토한 적이 있을 정도다. “전부터 디지털을 좋아해서 디자인 포럼에서 강연한 적도 있어요. 관객이 무대를 바라보는 시점이 고정적인데, 전 항상 시점 변화가 중요하다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향연’에서도 오고무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빙빙 돌린 거죠. 공연을 360도 원하는 방향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극장이라는 틀 자체가 고대부터 계속되어 온 것인데, 이제 그 틀을 깨는 시점이 온 것 아닐까요.”

은근히 ‘디지털은 난 몰라’를 기대했건만, 이 사람은 도무지 한계를 모르는 걸까. “한계요? 연애를 못 해요.(웃음) 하루의 89%를 일에 쓰고 11%를 쉬는데, 쉴 때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못 쓰거든요. 연애보다 시체처럼 멍하니 유튜브나 보면서 머리를 비우는 힐링을 택하겠어요. 제가 ‘모 아니면 도’거든요. 연애를 하려면 잘해야지, 가벼운 만남은 못하는 탓에 2007년 이후 아무도 못 만나고 있네요. 전보다 일이 100배쯤 많아지다 보니 이제 외로움에도 무뎌진 것 같아요.”

마치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지만, 죽어서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사는 건 아니다. 그저 열심히 살다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싶다는 것이다. “가끔 ‘나는 자연인이다’ 보면서 저러고 살아도 되는데 싶죠. 근데 뭐라도 열심히 해야 하는 체질이에요. 남들은 제가 명예욕이 심하다고 오해를 하는데, 오직 일 욕심만 있죠. 도전해서 결과를 만들고, 결과를 통해 흐름의 변화를 일으키는 게 만족스러워요. 스티브 잡스를 좋아하는 것도 그가 만들어낸 프로덕트가 세상의 흐름을 바꿨기 때문이죠. 어느 순간 핸드폰 안에 세계가 들어왔다는 게 감동적이지 않나요. 그런 감동을 만들어내고 좋은 영향을 미치고 싶어요. 아무 영향도 줄 수 없다면 안 하는 게 낫겠죠.”

그는 요즘 넷플릭스 드라마 ‘무브 투 헤븐’을 재미있게 봤다고 했다. 노란 유품 정리 상자 안에 외로운 사람들의 인생이 정리되는 것을 보며 매회 눈물을 쏟았단다. 그러면서 엉뚱하게 “존재조차 안 했던 것처럼 다 삭제하고 죽는 게 목표가 됐다”고 했다. 하지만 전방위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구호 브랜드’는 애초에 그런 상자 안에 정리될 수 없는 게 아닐까.

유주현 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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