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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ongyang' 써있는데 "제목 자체를 안봤다"···'능라도' 전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외주 영상 제작 업체가 무단으로 평양 영상을 삽입했고, 정부는 이를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18일 외교부가 발표한 P4G 정상회의 ‘능라도 영상’ 조사 결과다. 영상 제작사 측은 “실수였다” “몰랐다”는 입장으로 일관, 외교부는 수사 의뢰를 검토 중이다. 정부 측 관련자들에 대해서는 징계 조치 등이 예상된다.

외교부, P4G 회의 개막영상 조사결과 #외주업체 "강 화면 맘에 들어 썼을뿐" #외교부 "영상 제목도 확인 안했다니 #상식적이지 않아…수사 의뢰 검토" #외교부 준비단에도 관리 책임 추궁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P4G 정상회의(5월 30~31일, 서울 개최) 개막 영상에 능라도에서 시작돼 평양 일대를 비추며 지구 밖으로 줌 아웃되는 위성 촬영 영상이 삽입된 경위에 대해 자체조사한 결과를 밝혔다.

 지난달 30~31일 열린 P4G 정상회의 개막영상에 삽입된 능라도 영상 캡처.

지난달 30~31일 열린 P4G 정상회의 개막영상에 삽입된 능라도 영상 캡처.

첫 위성 영상 시작점은 평양 아닌 미국

외교부는 기획조정실 차원에서 지난 4일부터 외교부의 P4G정상회의 준비기획단, 행사 대행을 맡은 A사, A사로부터 영상 외주를 받은 B사, B사와 협력해 모션 그래픽 부분을 제작한 C사 등을 대상으로 사실관계를 파악했다.

경위는 이랬다. 개막 영상 첫 번째 버전이 준비기획단에 보고된 것은 5월 19일. 당시 영상에는 지구 영상 자체가 없었고, 수묵화 영상이 들어가 있었다. 기획단은 “행사 방향과 맞지 않는 것 같다”며 수정을 지시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2021 P4G 서울 녹색미래 정상회의' 정상토론세션 회의에서 서울선언문을 채택하고 주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2021 P4G 서울 녹색미래 정상회의' 정상토론세션 회의에서 서울선언문을 채택하고 주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이에 A사는 B사에 “40여 개국 정상이 참여하는 행사이니 지구 영상을 추가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이에 따라 5월 25일 개막 영상에 지구 영상이 처음 삽입됐다. 당시엔 미국에서 줌 아웃되는 영상이었다. 이 두 번째 버전의 영상까지는 준비기획단에 보고가 됐다.

제작사, 외교부에 보고 뒤 무단 수정  

문제는 이후 발생했다. B사 대표가 자체적으로 “서울에서 열리는 행사이니 미국이 아니라 서울 한강에서 줌 아웃되는 지구 영상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 C사에 영상 교체를 요구한 것이다.

C사는 영상 구매 사이트에서 여러 검색어를 넣어 영상을 검색했는데, 그렇게 찾아낸 게 문제의 능라도 영상이었다. C사 담당자는 능라도 영상의 미리보기 영상을 B사 담당자에 보내 의견을 확인한 뒤 이를 기초로 공동작업에 착수했다.

영상 구매 사이트에 있는 '능라도 영상' 원본.

영상 구매 사이트에 있는 '능라도 영상' 원본.

구매 사이트상의능라도 영상 원본에는 ‘북한(North Korea)’과 ‘평양(Pyongyang)’이 명시돼 있다. 그런데도 해당 영상을 쓴 데 대해 C사 담당자는 외교부 조사에서 “해당 영상을 찾을 때는 제목 자체를 보지 않았다”며 “언론보도가 나온 뒤 해당 사이트에 가서 다시 확인하니 제목에 평양, 북한이 들어가 있어서 실수를 후회했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강에서 줌 아웃되는 화면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 썼고, 당연히 한강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외교부, 리허설 3번 중 다 놓쳐

이런 일련의 과정은 B사와 C사 사이에 이뤄진 것으로, 외교부 준비기획단에는 일절 보고되지 않았다. 능라도 영상이 삽입된 개막 영상을 준비기획단이 처음 본 것은 행사 리허설 때인 5월 28일 밤이었다.

다음날 2차 리허설 때도, 행사 개막일인 5월 30일 오전 3차 리허설 때도 같은 영상이 상영됐다. 수많은 정부 관계자가 세 차례에 걸쳐 지켜봤지만, 아무도 줌 아웃되는 시작점이 능라도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왼쪽)과 한정애 환경부 장관이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 정부합동브리핑실에서 '2021 P4G 서울 정상회의' 결과 합동 브리핑을 앞두고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의용 외교부 장관(왼쪽)과 한정애 환경부 장관이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 정부합동브리핑실에서 '2021 P4G 서울 정상회의' 결과 합동 브리핑을 앞두고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아무리 사전보고를 받지 못했다고 해도, 문재인 정부 들어 최대 규모의 다자 정상 행사를 준비하면서 영상의 장면 하나하나를 세심히 확인하지 못한 책임은 피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준비단, 업체에 위임하고 관리 책임 방기”

외교부 당국자도 “리허설을 할 때 준비기획단은 영상 후반부의 자막과 참가국 국기, 참가 정상의 이름 등이 제대로 들어갔는지에 집중하느라 전반부 영상은 체크하지 못하고 지나갔다. 최종 콘텐트 점검이나 승인이 준비기획단의 주 임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런 관리 책임을 사실상 방기했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개막식 영상물만 별도로 시사회나 평가회를 열어 점검해야 했는데, 민간 행사업체에 일체를 위임하는 중대한 귀책사유를 야기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준비기획단은 영상 관련 모든 업무를 A사에 맡겼고, B사와 C사에 대해서는 존재 자체도 알지 못할 정도로 면밀히 관리하지 않았다.

2021 서울 P4G 서울 녹색미래 정상회의를 이틀앞둔 지난달 28일 서울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정상회의 개막식장에서 관계자들이 막바지 준비작업을 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2021 서울 P4G 서울 녹색미래 정상회의를 이틀앞둔 지난달 28일 서울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정상회의 개막식장에서 관계자들이 막바지 준비작업을 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민ㆍ형사상 조치 불가피할 듯

이에 따라 외교부는 준비기획단 등 관련자들에 대해 책임을 묻겠다는 방침이다. 이번에 조사 대상이 된 능라도 영상 관련자는 4명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각기 책임의 경중에 따라 엄중하게 책임을 물을 예정”이라고 밝혀 조만간 징계 수순에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

가장 관심을 끈 ‘의도성’과 관련, 외교부는 북한과 평양이 명시된 파일 제목조차 확인하지 않고 영상을 가져다 썼다는 C사 담당자의 해명이 상식적이지 않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강제수사 권한이 없는 외교부 차원의 조사만으로는 진상 규명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감사원이나 검ㆍ경 등 외부 기관에 수사 의뢰를 검토 중이다.

외교부는 또 A사에 대해서는 국가와의 계약에서 관리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잘못이 명확하기 때문에 손해 배상 청구 등 적극적인 조처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유지혜ㆍ박현주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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