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세 취준생 "은퇴자들이 딴다는 손해평가사 자격증 공부"

중앙일보

입력 2021.06.17 00:02

업데이트 2021.06.17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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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올해 2월 서울의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한 정모(26)씨는 아직도 학교 도서관과 학원을 드나들고 있다. 은행권 취업을 꿈꾸는 그는 그간 각종 금융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며 이른바 ‘맞춤형 스펙’을 확보하는 데 집중해 왔다. 정씨는 “은행이 상반기 공채를 진행하지 않고 채용 규모도 줄이면서 목표 달성이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500대 기업 신입공채 비중 39%
나머지는 경력·수시채용 채워
알바자리 구하려 수십 곳 지원
석달 걸려 편의점 알바 따내기도

5대 그룹 중 삼성 빼곤 공채 폐지
코로나로 경영상황 불확실 영향
지난달 취준생 89만명 역대 최고

시청 알바 36명 모집 1000명 몰려
재학생은 여름방학 알바 쟁탈전

김모(32)씨는 최근 취업 준비를 잠시 접고 손해평가사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신규 채용 규모가 줄어든 데다 수시 채용이 많아지면서 언제 취업 기회가 생길지 불확실해졌기 때문이다. 김씨는 “손해평가사는 주로 은퇴하신 분들이 노후 준비로 많이 응시한다고 들었지만, 마냥 손 놓고 기업 채용만 기다릴 순 없어 자격증이라도 따두자는 마음에 시작했다”고 했다.

안 그래도 ‘바늘구멍’이었던 신규 대졸자와 대졸 예정자의 취업 문이 이제 ‘나노 구멍’으로 불릴 정도로 좁아졌다.

중소·중견기업뿐 아니라 경영 사정이 비교적 좋은 500대 기업도 최근 신입 공개 채용을 크게 줄였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여파로 소상공인의 폐업이 늘고 무인 점포가 확대되면서 아르바이트 자리 구하기도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500대 기업 2분기 채용 동향.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500대 기업 2분기 채용 동향.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16일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채용 계획이 있는 매출 상위 500대 기업 중 신입사원을 뽑은 곳은 62.4%였다. 나머지(37.6%)는 경력 사원을 채용했다. 특히 신입 채용 중에서도 37.3%는 수시 선발 방식이었고, 과거처럼 공개 채용으로 신입 직원을 뽑은 곳은 62.7%였다. 전체 채용에서 ‘신입 공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도 안 되는 39.12%에 불과했다는 얘기다. 직군별로 보면 신입 채용이 많은 곳은 영업 및 마케팅(78.2%), 생산기술(62.9%), 기타(62.6%), 경영지원(52.9%) 순이었다.

500대 기업 중 신입 비중 높은 직군.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500대 기업 중 신입 비중 높은 직군.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500대 기업 중 경력 비중 높은 직군.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500대 기업 중 경력 비중 높은 직군.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경력직은 IT(71.4%)·연구개발(60.2%)에서 비중이 컸다. 고용정보원에서 500대 기업 채용 동향을 조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경력과 수시 채용 확대 때문으로 분석된다. 고용정보원 관계자는 “코로나19로 경영 상황이 불확실해 경력직과 수시 채용 방식을 선호하는 기업이 많았다”며 “경력 채용은 원래 증가했는데, 최근에는 신입사원 수시 채용도 기업이 확대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디지털 전환 등으로 일하는 환경이 바뀌고, 최저임금·52시간제의 시행으로 신규 채용 부담이 커지면서 기업은 신입사원보다는 실무 능력이 검증된 경력직 채용을 선호하는 추세다. 또 대규모 인원을 한번에 공개 채용하는 방식은 비용이 많이 드는 점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구인·구직 중개서비스 사람인이 지난 4월 330개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경력직을 신입보다 우선 채용’한다는 기업이 53.3%로 나타났다. ‘신입 위주로 채용한다’는 기업은 11.2%에 불과했다. 경력직 우선 채용 이유로는 ‘바로 업무에 투입할 인력이 필요해서’(73.9%, 복수응답)가 꼽혔다.

한국경제연구원이 500대 기업을 조사한 자료에서도 38.2%가 올해 수시 채용 방식으로 직원을 뽑겠다고 답변했다. 공개 채용과 수시 채용을 병행하겠다는 응답도 38.2%였다. 고용정보원 관계자는 “수시 채용은 말 그대로 필요한 인원이 있을 때 뽑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정기 공채보다는 채용 인원이 불확실하고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했다.

올해 500대 기업 중 채용계획.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올해 500대 기업 중 채용계획.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주요 대기업은 이미 공채제도를 속속 폐지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올해 공채를 폐지하고 계열사별 수시 채용으로 전환했다. SK그룹도 내년부터 수시 채용으로 바꾼다는 방침이다. 현대차와 LG도 2019년에 이미 정기 공채를 폐지했다. 5대 그룹 중 공채를 유지하고 있는 곳은 삼성뿐이다.

IT·연구개발 분야 신입보다 경력 선호

통계청 마이크로데이터를 분석해 보면 지난달 취업준비생은 89만 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7만 명이 급증했다. 관련 통계를 집계한 2003년 이래 가장 많다. 취업 준비자는 비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취업을 위해 학원·기관 등에서 강의를 수강하거나 이외의 취업 준비를 한 사람을 말한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은 고용시장의 경직성이 강해 일자리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청년들 입장에서는 열악한 일자리에서 출발할 경우 양질의 일자리로 이직하기 어렵다”며 “청년층은 처음부터 양질의 일자리로 진입하기 위해 취업 준비 기간을 늘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500대 기업 올해 채용 않는 이유.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500대 기업 올해 채용 않는 이유.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심지어 아르바이트 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다. 16일 오후 4시 충남 아산시가 유튜브 생방송을 했다. 생방송 제목은 ‘2021년 하계 대학생 아르바이트 선발 추첨’. 진행자 2명이 추첨 프로그램 버튼을 누르자 선발 대상자 이름들이 화면에 나타났다. 약 15분간 이어진 방송으로 시청에서 일할 대학생 36명이 선발됐다. 아산시가 코로나19로 아르바이트 자리가 줄어든 지역 대학생을 위해 진행한 이번 알바 추첨엔 1000여 명이 몰려 27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아산시 관계자는 “절차의 투명성과 공정함을 위해 지난해에 이어 실시간 중계 방식으로 추첨 과정을 공개했다”며 “여름방학에 맞춰 할 수 있는 알바이다 보니 대학생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1학기 종강을 앞둔 대학생이 여름방학 알바 구직 경쟁에 뛰어들고 있지만 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다. 지난 15일 서울 A대 온라인 커뮤니티에 “주 3~4일 엑셀 작업하는 학생을 구한다”고 올라온 글은 공지 세 시간 만에 마감되기도 했다.

경기도 내 한 대학에 다니는 2학년 A씨는 “지금 하는 편의점 알바 구하는 데만 지난 겨울방학 때부터 석 달 넘게 걸렸다. 수십 군데 지원해 붙은 곳이 여기”라고 말했다.

대학생 전용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비슷한 고민이 이어졌다. 한 대학생은 “상반기 인턴이나 알바에 계속 지원하고 있는데, 공채나 수시 채용보다 더 안 붙는 것 같다. 이번 방학이 공백기가 될 것 같아서 뭐라도 붙었으면 좋겠는데 속상하다”고 적었다. 또 다른 대학생은 “알바가 잘 구해지지 않아 ‘노가다’(일용직 노동)라도 해야 할까 싶다”는 고민을 털어놨다.

대학생 93% “여름방학 알바 계획”

구인·구직 아르바이트 전문 포털 ‘알바천국’이 최근 대학생 1679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 93.2%가 여름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계획하고 있다고 답했다. 구직 난이도에 대해서는 ‘매우 어려울 것’(16.9%)과 ‘어려울 것’(50.7%)이라고 답해 난항을 예상했다. 서울 동작구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한 업주는 “대학 커뮤니티에 아르바이트 구인 공고를 올리면 휴대전화가 계속 울린다. 면접을 봐야 하니 일단 다 오라고는 한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부의 청년 일자리 정책의 변화를 주문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경력이 없는 이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최저임금과 같은 노동비용 문제 등으로 청년층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고 진단했다. 성 교수는 “공공 단기 아르바이트는 일시적인 효과만 있다”며 “최저임금제 등 노동시장에 가해졌던 충격을 완화하는 쪽으로 정책이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청년 일자리를 위해 6조원을 투자한다고 하는데, 공공 일자리를 늘리는 데 집중하지 말고 바우처 지급 등을 통한 교육과 훈련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남준·채혜선 기자 kim.nam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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