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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 불발 네탓…한·일 대놓고 비난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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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한·일 정상회담 불발 후폭풍이 거세다. 양국 정부가 회담 무산의 책임과 이후 대응 방식을 놓고 상대방을 비난하며 ‘네 탓 공방’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라는 다자 행사를 계기로 모처럼 마련됐던 화해의 기회를 놓친 것도 모자라 양국 간 위기가 증폭되고 있다.

“일본이 독도훈련 문제삼아 취소” #외교부 발언, 언론 통해 알려지자 #일본 관방장관 나서 “사실 아니다” #G7 화해 기회가 오히려 갈등 키워

지난 11~13일 영국 콘월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 간 정상회담이 성사되지 못한 배경에 대해 먼저 입을 연 건 한국 쪽이었다. 외교부 당국자는 14일 “실무선에서 회담 개최를 잠정 합의했지만 일본이 동해 영토수호 훈련(독도방어 훈련)을 문제 삼아 회담 취소 의사를 전해 왔다”고 설명했다.

외교부의 이 같은 입장은 한국은 정상회담에 적극적이었지만 결국 일본의 경직된 태도가 문제였다는 취지로 풀이됐다. 독도방어 훈련만 하더라도 1996년부터 매년 진행해 온 정례 훈련인데 일본이 이를 갑자기 문제 삼아 사실상 정상회담을 하기로 해놓고 입장을 바꿨다는 게 외교부의 설명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SNS에 “스가 총리와의 첫 대면은 한·일 관계에서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며 “회담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고 올렸다.

하지만 일본 측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은 오후 정례 기자회견에서 관련 질문에 “사실에 반하는 일방적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내용과 공개 방식을 모두 문제 삼았다. “이번 G7 정상회의에서는 일정 등의 사정으로 인해 정상회담이 실시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한국 외교부의 설명은) 사실에 반할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일방적인 발신은 매우 유감이며 즉각 한국에 항의했다”고 말했다.

일본 외무성 관계자 역시 “독도방어 훈련을 이유로 일본이 정상회담을 거부했다는 보도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번에는 (양국 정상 간) 스케줄이 맞지 않아 정상회담을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관련 사정에 정통한 외교 소식통도 “실무선에서조차 정상회담을 하자는 잠정 합의는 이뤄진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외교가에서는 양국 간의 진실 공방을 한·일 정상회담 무산만큼이나 당황스럽게 여기는 분위기다.

한국은 물밑 협의 흘리고, 일본은 한국보도 듣고 항의…외교가 “정상적 상황 아니다”

스가 총리

스가 총리

한국이 일방적으로 정상회담이라는 최고위급 외교 행사 개최를 위한 외교채널 간 물밑 협의 내용을 언론 보도라는 형식을 빌려 공개한 것도, 일본이 한국의 공식 발표도 아닌 언론 보도만으로 공개적으로 불쾌감을 표하며 공식 항의한 것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G7 정상회의 직전만 해도 현장에서 한·일 정상 간 회동이 극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다자회의에서는 전체 회의 중에 잠깐 복도로 나가 만나는 식의 약식 정상회담도 자연스럽게 이뤄지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과 스가 총리가 한자리에 모이는 이상 짧더라도 부담 없이 첫 정상회담을 가질 좋은 기회였다.

특히 정상회의 불과 나흘 전 전범 기업에 강제징용 피해 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서울중앙지법 판결이 나오면서 양국 간 과거사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결국 한·일 정상회담뿐 아니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중재하는 한·미·일 정상회의조차 성사되지 않았고, 양국은 상대방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다.

두 정상의 이런 태도는 결국 국내정치적 요인에 영향을 받았다는 지적이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문 대통령은 임기 말을 맞이했고, 스가 총리 역시 국내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리면서 관계 개선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없는 소극적 입장”이라며 “두 정상 모두 더는 손대지 못하고 현상 유지에 급급한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한 외교 소식통도 “두 정상은 국내 여론을 의식할 때 상대방을 봐줄 여유가 없다”며 “문재인 정부 임기 내에 한·일 간 의미 있는 대화가 시작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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