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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의화단 진압한 연합군, 만행 일삼았지만 미군은 자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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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0〉

베이징 입성 후인 1900년 가을, 만리장성 유람을 즐기는 미 해군 육전 대원과 대사관 직원. [사진 김명호]

베이징 입성 후인 1900년 가을, 만리장성 유람을 즐기는 미 해군 육전 대원과 대사관 직원. [사진 김명호]

2천여 년 전, 찬란한 거성(巨星)의 출현에 동방의 현인 3명이 넋을 잃었다. 별이 지시하는 새로운 종교(기독교)의 탄생지를 찾았다. 훗날 기독교는 서구의 생활과 정신세계에 확고한 지위를 점했다. 평화와 인애를 종지로, 누가 오른뺨 때리면 왼쪽도 내주라고 신도들에게 강조했다. 신자들은 고난과 좌절이 그치지 않았다. 로마 맹수의 위협과 이교도의 학대를 감내하며 신앙을 전파했다. 당나라 초기, 기독교는 중국까지 흘러들어왔다. 당 태종이 경교사(景敎寺)라는 절까지 지어줬지만, 중국인들을 제대로 빨아들이지 못했다. 다시 몇백 년이 흘렀다. 17세기 중엽, 예수회 선교사들이 서구의 천문학을 들고 중국에 들어왔다. 예수회에는 최고의 지식인과 과학자인 선교사들이 즐비했다. 황제의 호감을 산 선교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당시 서구민족은 활력이 넘쳤다.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과학도 발전시켰다.

영·프랑스군, 살인·방화·유적 파괴 #청 황태후는 변복해 외지로 탈출 #미, 자금성 등 고건축 보존에 앞장 #중 노동자 30만 명 이상 미국 이주 #19세기 동서 횡단철도 건설의 주역

예수회 선교사들 천문학 들고 중국에

중국인에게 중국어를 배우는 미 육전대 장교. 1900년 11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중국인에게 중국어를 배우는 미 육전대 장교. 1900년 11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중국인들은 종교에 관심이 없었다. 수천 년간, 종교 비슷한 것을 앞세운 농민반란은 있어도 종교분쟁은 일어난 적이 없었다. 17세기 중엽, 군함을 앞세운 상인들과 함께 기독교가 유입됐다. 무력과 종교가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안 중국인들은 당황했다. 이런 말이 나돌았다. “부처님은 코끼리 등에 앉아 중국에 들어왔다. 예수 그리스도는 포탄을 타고 날아왔다.”

서구 열강의 포탄 세례를 맛본 중국인들은 폭죽 자료로만 알았던 화약의 위력에 놀랐다. 포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제조 기술만 배우면 설욕할 날이 온다고 이를 악물었다. 여자 문제 외에는 가장 지혜로웠던, 국민당 원로 장멍린(蔣夢麟·장몽린)의 회고를 소개한다. “역사의 발전은 정말 예측하기 힘들다. 한동안 우리는 포탄 연구와 기계 발명에 몰두했다. 하고 나니 정치개혁이 필요했다. 정치 개혁하자니 알아야 할 것이 많았다. 정치이론 연구에 머리를 싸맸다. 정치이론에 몰두하다 보니 서구철학과 접촉했다. 개혁은 함부로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계의 발명은 과학의 발현(發現)이라는 것을 깨우치기까지도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우리는 포탄에서 멀어지기 위해 서구의 신무기 지원에만 매달렸다. 군수산업만 일으키면 포탄에서 멀어질 줄 알았다. 포탄의 공포에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더 가까워졌다는 것을 자각하고 가슴을 쳤다.”

미·중 합작외교의 산물인 ‘푸안천(浦安臣·포안신)조약’ 서명 후 청나라는 신생국 미국에 의존했다. 여자를 제외한 양국 국민의 왕래도 자유로웠다. 30만 명을 웃도는 중국 노동자(華工·화공)가 미국 땅을 밟았다. 화공들은 서부 개발과 철도 건설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과로와 저임금으로 희생자가 1만 명을 넘었다. 1869년 동서 횡단철도 완공 기념식 날 철도공사 이사장이 화공들의 공로에 경의를 표했다. “빈곤과 무시를 감수하며 묵묵히 일한, 중국 노동자의 성실과 근면이 없었더라면, 이 철도의 조기 완성은 불가능했다. 우리는 그 공을 잊으면 안 된다.” 화공들은 캘리포니아주 북부 새크라멘토 삼각주 지대의 거대한 소택지도 양전(良田)으로 둔갑시켰다. 화공 6만여 명이 농사로 미국인들의 배를 채워줬다. 캘리포니아의 금광, 탄광, 은광의 노동력도 화공이 전담했다.

8국 연합군 철수 후 베이징으로 돌아온 즈시 태후는 외국 공사 부인의 접견을 허락했다. 오른쪽 둘째가 미국 공사 부인. 1902년 10월, 즈진청. [사진 김명호]

8국 연합군 철수 후 베이징으로 돌아온 즈시 태후는 외국 공사 부인의 접견을 허락했다. 오른쪽 둘째가 미국 공사 부인. 1902년 10월, 즈진청. [사진 김명호]

화공들의 노동환경은 열악했다. 백인 지상주의가 팽배하던 시절이다 보니 사람취급도 못 받았다. 노예해방 후에는 자유노동자가 된 흑인들과 밥그릇 싸움이 벌어졌다. 경제위기로 실업률이 상승하자 화공들에게 책임을 넘겼다. 중국인 배척운동이 벌어졌다. 1882년 배화법(排華法)이 의회를 통과했다. ‘푸안천조약’은 14년 만에 휴짓조각이 됐다. 화공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중국에 와있는 미국인들은 천국이 따로 없었다. 치외법권 누리며 무리한 행동 해도 제재가 따르지 않았다. 선교사 중에는 엉뚱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지역 농민을 노예처럼 부렸다. 부녀자 추행과 폭행은 기본이었다. 1899년, 산둥(山東)의 무술단련 민간조직 의화단(義化團)이 들고일어나자 농민도 합세했다. 교회를 불사르고 선교사들을 두들겨 팼다. 황태후 즈시(慈禧·자희)는 의화단의 외세배척 운동을 지지했다.

“외세 배척” 의화단, 성당·교회 불태워

1900년 경자년(庚子年) 8월, 톈진(天津) 조계까지 진출한 의화단은 수도 베이징에 입성했다. 군인들까지 가담한 의화단은 ‘양인(洋人)구축과 청 황실 보위’를 외치며 근왕군(勤王軍)을 자처했다. 성당과 교회를 불구덩이로 만들고, 외국 선교사들을 도륙했다.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8개국이 연합군을 결성했다. 연합군 3만 명 중 미군은 1200명 내외였다. 즈시는 변복 차림으로 베이징을 탈출했다.

베이징을 점령한 연합군은 3일간 자유 시간을 줬다. 살인, 방화, 부녀자 강간으로 고도(古都)가 인간 지옥으로 변했다. 즈진청(紫禁城), 중난하이(中南海), 이허위안(頥和園)에 있는 진기한 보물들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군은 정원중의 정원 원명원(圆明园)을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미군은 만행을 자제했다. 즈진청을 보존하고 고건축 보호에 앞장섰다. 거리 청소와 공중 화장실 건설로 중국인들의 환심을 샀다. 중국 연구에 열중하는 미국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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