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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화폐 '믹싱'까지…텔레그램 마약상 ‘용호상박’의 도피 수준

중앙일보

입력

지난 3월 서울 송파구 일대 주택가 가스배전함에서 A씨 일당이 포장한 마약류를 숨기고 있다. 사진 인천경찰청

지난 3월 서울 송파구 일대 주택가 가스배전함에서 A씨 일당이 포장한 마약류를 숨기고 있다. 사진 인천경찰청

지난해 여름 A씨(25)는 알고 지내던 B씨(27) 등을 비밀리에 불러 모았다. 20,30대를 상대로 마약류를 팔아 돈을 벌어볼 심산이었다. 서로의 인맥을 동원해 하나둘 모았더니 그럴싸한 조직이 꾸려졌다. 판매총책 A씨를 중심으로 밀반입책, 인출책, 중간판매책 등으로 구성된 팀이었다.

직접 암호 화폐 구매대행사 차렸다

암호화폐 구매대행사-구매자간 텔레그램 대화내용. 사진 인천경찰청

암호화폐 구매대행사-구매자간 텔레그램 대화내용. 사진 인천경찰청

A씨가 텔레그램에 인증이 필요한 ‘마약 채널’을 만들면서 범죄행각이 시작됐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아이스 드롭’ ‘액상 떨’을 검색한 이들이 링크를 타고 채널에 들어오면 거래를 텄다.

여기서 B씨가 만든 암호 화폐 구매대행사(구매대행사)가 등장한다. 구매대행사는 거래소를 이용하지 못하는 이들을 대신해 구매대행 수수료를 받고 암호 화폐를 구매해주는 곳이다. 이들은 고객이 암호 화폐 구매대행사에 대금을 입금하면 마약을 건네기로 했다.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시아에서 몰래 들여온 LSD, 엑스터시, 합성 대마를 알루미늄 포일 등으로 포장한 뒤 중간관리책이 가스 배관, 자동차 앞바퀴 등에 숨겨두는 속칭 ‘던지기 방식’을 사용했다.

‘믹싱’으로 추적 피하려 했지만…

A씨 일당의 암호화폐 구매대행사 이용, 마약류사범 체계도. 사진 인천경찰청

A씨 일당의 암호화폐 구매대행사 이용, 마약류사범 체계도. 사진 인천경찰청

총책 A씨와 경찰은 숨막히는 ‘사이버 추격전’도 벌였다. A씨가 ‘사자’와 ‘용호상박’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마약 채널은 경찰이 주목하는 요주의 대상이었다. 수사기관은 체인널리시스(Chainalysis) 등으로 추적에 나선 상태였다. 평소 암호 화폐 관련 공부를 한 조직원이 아이디어를 냈다. 암호 화폐를 섞는 이른바 ‘믹싱’기법을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방법은 이랬다. 먼저 구매자가 구매대행사의 차명계좌로 현금을 입금하면 거래소 계정으로 암호 화폐 구매·믹싱작업을 한다. 이후 판매자의 일회용 지갑으로 전송한다. 판매자는 코인 형태의 그 마약대금을 다시 구매대행사로 보낸다. 그러면 구매대행사는 다시 마약대금을 믹싱 작업해 현금화한 뒤 판매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판매자는 “믹싱 작업을 거쳤기 때문에 수사기관이 절대 마약 거래 대금인지 몰라서 안전하다”면서 구매자에게 거래를 유도했다. 이들은 이를 통해 10억원상당의 마약류를 판매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1월 중순 경찰은 경기 성남시 수정구 B씨 주거지에서 대마, 투약기구를 압수했다. 사진 인천경찰청

지난 1월 중순 경찰은 경기 성남시 수정구 B씨 주거지에서 대마, 투약기구를 압수했다. 사진 인천경찰청

지난해 말 관련 첩보를 입수한 경찰은 수사에 나섰다. 지난해 11월 밀반입책을 체포한 데 이어 인출책과 구매대행사 운영자 B씨를 붙잡으면서 수사가 급물살을 탔다. 이 과정에서 B씨 등은 암호화폐 구매대행 사업을 합법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수사에 혼선을 주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지난 3월 경찰은 총책 A씨를 검거하고 자택과 이들이 옮겨 다니던 모텔 등지에서 필로폰 53.6g, LSD 400개, 엑스터시 656정, 케타민 587.99g 등 시가 5억8000만원 상당의 마약류를 압수했다.

주로 20~30대, 고등학생도 마약 구매

인천경찰청 광역수사대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향정 및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 위반 혐의로 마약 유통 총책인 A씨와 암호화폐 구매대행사 대표 B씨 등 9명을 구속하고 판매·인출책 등 8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9일 밝혔다. 또 이들로부터 마약을 구매해 투약한 혐의를 받는 고등학생 C군(19) 등 149명도 불구속 입건했다. 구매자 중에는 20,30대가 가장 많다고 한다.

경찰은 구매대행사의 장부 등을 토대로 구매 의심자와 판매책 등으로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암호 화폐 믹싱 작업을 하더라도 시간이 늦춰질 뿐 자금 흐름을 추적할 수 있다”며 “규제 사각지대에서 암호 화폐를 활용한 다양한 범행 수법이 나오고 있어 법적·제도적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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