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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바둑의 향기 되살린 천야오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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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지난해 한국과 중국 바둑팬들의 시선이 총집중된 가운데 치러진 삼성화재배 결승전에서 신진서 9단이 흑17수를 돌연 1선에 착점하면서 벌어진 해프닝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터치패드가 마우스 줄을 건드리면서 벌어진 사건인데 코로나가 초래한 온라인 대국의 문제점에서 시작해 승부란 무엇이고 바둑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까지 다시 생각게 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김지석 마우스 미스 재착점 요청 #‘민망한 승리’ 대신 정정당당 승부

커제 9단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음 수를 두었고 그 순간 1선 착점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사실상 승부가 난 것이다. 커제는 대국 후 “만약 신진서가 이의제기를 했으면 다시 두는 것에 동의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버스 떠난 뒤의 얘기였다. 커제가 1선 착점 옆에 나란히 돌을 놓았다면 얼마나 멋있는 장면이 됐을까 하고 아쉬움을 토로해보기도 했지만 그런 낭만이 밀림의 승부 세계에서 통할 리 없었다. 바둑은 스포츠가 되면서 규칙을 빙자한(?) 민망한 승리가 흔해졌고 예도의 향기는 한 시대의 추억이 됐다.

2021 중국갑조리그 1라운드에서 놀라운 반전이 펼쳐졌다. 취저우 팀의 김지석 9단 대 베이징기원의 천야오예 9단이 벌인 주장전에서 김지석이 흑57수를 1선에 두었다. 진짜 마우스 미스가 등장한 것이다. 한데 그다음의 전개가 상상을 초월했다. 한국기원의 중국통 김경동씨에 따르면 1선 착점을 본 천야오예가 심판에게 쫓아가 “마우스 미스 같은데 다시 두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김지석을 대신해 착수 오류신청을 한 것이다. 대회 조직위는 특이한 판정을 내린다. “마우스 미스는 본인 책임이지만 상대 천야오예가 단호한 태도를 취하므로 그 의견을 존중해 다시 두는 것을 허락한다.”

결국 1선 착점 대신 다른 수가 놓여졌고 결과는 김지석의 승리. 그는 대국 후 이렇게 말했다.

“명백한 내 실수, 졌구나 생각했다. 개막전이라 팀에 더욱 미안했다. 그때 천야오예가 다시 두지 않겠느냐고 제안해줘서 염치 불고하고 다시 뒀는데 어떤 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 천야오예한테 감사하고 기사로서 많은 것을 배웠다.”

훼쉐밍 중국 국가대표 단장은 “규칙은 규칙이다.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오늘 천야오예처럼 오점 있는 기보를 남기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도 권장하고 고양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고 녜웨이핑 9단은 “고풍양절(高風亮節:인격이 높고 절개가 굳다)”이라며 박수를 보냈다.

‘오점 없는 기보’는 기도(棋道)를 숭상하던 시절의 단어다. 당시엔 큰 승부를 앞두고 “좋은 기보를 남기고 싶다”는 말이 단골 멘트였다. 부끄럽지 않은 승리는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러므로 승부 세계에서 이기고자 하는 마음과 부끄럽지 않은 승리 사이에는 숱한 갈등이 존재했다.

20년 전 류시훈 9단 대 왕리청 9단의 일본 기성전 도전기. 2대2에서 맞은 제5국에서 기묘한 장면이 연출됐다. 바둑은 흑의 류시훈이 이겼는데 공배를 메우다 흑 6점이 단수에 몰렸다. 류시훈은 까마득히 모르고 지나쳤고 왕리청은 잠깐 머뭇거리다 흑 돌을 우두둑 따냈다. 승부는 뒤집어졌고 결국 왕리청은 4대2로 우승했다. 우승상금은 약 5억원. 왕리청은 눈을 한번 질끈 감고 5억원 쪽을 선택했다. 무엇이 옳았을까. 20년 전이고 또 일본은 바둑이 스포츠가 아니다. 많은 비난이 따랐다. 하지만 당시에도 “기도 정신은 구겨졌지만 인지상정 아니겠냐”는 해석도 있었다. 지금 묻는다면 프로기사의 99%가 따내는 게 당연하다고 말할 것이다.

바둑 룰은 스포츠가 되면서 더 엄격해졌는데 아쉽게도 신사적인 마인드가 손해를 보고, 이기고 보자는 쪽이 이득을 보는 부분이 존재한다. 천야오예의 행동은 수많은 박수를 받았는데 그걸로 끝나야 할까. 팬들은 정정당당한 승부를 원한다. 바둑 룰에 팬 친화적인 요소를 도입하는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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