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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떠나면 北에 죽임 당한다" 크리스토퍼 안의 'LA 호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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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관 습격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미국 검찰이 기소한 한국계 미국인 크리스토퍼 안이 2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연방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관 습격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미국 검찰이 기소한 한국계 미국인 크리스토퍼 안이 2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연방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5일(현지시간) 오전 10시 30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시내에 있는 연방 법원 690호 법정.

2019년 마드리드 北 대사관 습격 #스페인 정부, 신병 넘겨 달라 소송 #변호인단, '김일성 가계도'까지 꺼내 #"김정은 휘하조직, 일 꾸밀 가능성 커"

2019년 2월 스페인 마드리드 주재 북한대사관 습격에 가담한 것으로 지목된 한국계 미국인 크리스토퍼 안(41)이 모습을 드러냈다. 감색 정장과 푸른색 넥타이 차림에 머리는 군인처럼 단정하게 빗어넘겼다.

이날 법정에선 그를 스페인으로 송환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기 위한 범죄인 인도 재판의 심리가 열렸다. 스페인 정부는 안 씨가 자국 내 외교공관에 침입한 반(反)북한단체 '자유 조선' 소속 용의자 7명 중 한 명이라며 미국 측에 신병을 넘겨 달라고 요청했다. 스페인 검찰은 안 씨를 건조물 침입, 불법감금, 협박, 강도, 상해, 조직범죄 6가지 혐의로 기소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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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연방 검찰과 변호인단은 우선 스페인 사법당국이 적용한 6개 혐의를 안 씨가 저질렀다고 볼 만한 타당한 이유(probable cause)가 있는지를 놓고 다퉜다.

검찰은 스페인 정부로부터 건네받은 대사관 안팎 폐쇄회로 영상(CCTV)과 북한 외교관 및 가족의 증언, 가짜 총과 수갑·테이프 구매 영수증 등을 제시하며 송환 필요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변호인단은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맞받았다. 당시 망명을 하려는 북한 외교관들의 부탁을 받고 대사관에 들어갔고, 북한에 남아있는 외교관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위장 납치극'을 벌인 것이란 반박이다.

그런데 이런 내막을 모르던 북한 외교관 부인 조선희가 창문을 통해 뛰어내려 대사관 밖으로 나가 도움을 요청하면서 망명 작전이 무위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안 씨 측은 북한 대사관 직원들의 사후 진술 역시 실패한 망명을 숨기기 위한 거짓 증언이라고 했다. 스페인 수사당국에서 조선희가 "침입자들이 사람을 죽이고, 아이들을 먹는다"고 말한 것을 사례로 들었다.

북한 전문가인 이성윤 터프츠대 교수는 증인으로 출석해 "미국인들이 아이를 먹는다는 표현은 과거 북한 교과서에 흔히 쓰던 표현"이라며 "반역은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중범죄인 만큼 죽음을 모면하고자 불안한 마음에 교조적인 반응이 나온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북단체 자유조선 멤버인 크리스토퍼 안은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암살당한 뒤 그의 장남 김한솔과 가족을 구출했다. 자유조선은 김한솔(왼쪽)과 안 씨의 사진을 공개했다. [연합뉴스]

반북단체 자유조선 멤버인 크리스토퍼 안은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암살당한 뒤 그의 장남 김한솔과 가족을 구출했다. 자유조선은 김한솔(왼쪽)과 안 씨의 사진을 공개했다. [연합뉴스]

또 다른 쟁점은 안 씨에게 '인도주의적 예외'를 적용할 것이냐였다. 변호인은 안 씨의 신병이 스페인에 넘겨지면 북한의 살해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며 송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안 씨를 보내면 분명 북한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것"이라며 "(스페인) 감옥에서 죽었다는 헤드라인이 전 세계 언론을 뒤덮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북한인들의 진술을 토대로 한 이번 범죄인 인도 요청은 스페인 정부가 아닌, 북한이 조종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도 했다.

변호인단은 이어 '최악의 테러지원국'으로 꼽히는 북한이라는 특수 상황을 고려해 법원이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안 씨 암살 가능성은 추상적인 주장이 아니라 실재하는 위협이라는 것이다.

안 씨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형 김정남의 장남 김한솔을 구출하는 데 관여한 전력이 있어 더욱 위험하다는 설명이었다.

진 로젠블루스 판사를 설득하기 위해 김일성 일가 가계도와 북한 정부 조직도까지 꺼내 들었다.

변호인단은 "북한은 장남이 권력을 승계하는 독재 국가"라면서 "원래대로라면 김정남과 그의 장남 김한솔이 집권해야 했는데, 관례를 깨고 3남인 김정은이 집권했다"고 소개했다.

김정은이 집권 후 김정남을 살해했고, 그의 장남인 김한솔을 마카오에서 구출한 게 안 씨이기 때문에 현재 북한 정권의 표적이 돼 있다는 것이다.

특히 북 정찰총국은 김정은에게 직보하고 일을 꾸밀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조직이라고 설명하자, 로젠블루스 판사는 의자를 바짝 끌어당기며 경청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날 법정에는 북한에서 숨진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가족도 안 씨를 지지하기 위해 나왔다.

오토 웜비어의 어머니 신디 웜비어는 아들 사례를 거론하며 "북한이 크리스토퍼 안을 죽이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면서 "북한은 자국민을 포함해 누구나 마음먹으면 죽일 수 있고, 거짓에 거짓에 거짓을 말하는 나라"라고 주장했다.

검찰 측은 안 씨에 대한 살해 위협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반박도 동의도 하지 않았다. 다만 미국이 스페인과 맺은 범죄인 인도 조약에 따라 안 씨가 스페인에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하며, 안전 문제는 협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검사는 "미국법에 따르면 인도주의적 예외는 법원이 아니라 국무부가 결정하게 돼 있다"면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최종적으로 결정할 일이지 법원이 판단할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신디 웜비어는 "내 아들을 돌려 달라고 국무부에 빌었으나 그들은 '괜찮을 거다'라는 말만 반복했다"면서 "크리스토퍼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관 습격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미국 검찰이 기소한 한국계 미국인 크리스토퍼 안이 2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연방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관 습격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미국 검찰이 기소한 한국계 미국인 크리스토퍼 안이 2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연방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팽팽한 공방 속에 결정을 내려야 할 로젠블루스 판사도 인간적인 고민을 숨기지 않았다. 점심시간을 포함해 6시간 동안 열린 심리에서 그는 여러 차례 "이번 사건은 너무 어렵고 힘들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안 씨를 "미 해병대원으로 복무한 뒤 명예롭게 제대하고 형사처벌 기록도 없는 청년"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현행법은 안 씨에 대해 송환 결정을 내리는 쪽으로 기울어져 판단이 쉽지 않다는 뜻을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검사와 변호사, 그리고 재판부가 성실하게 각자 임무를 하고 있다면서 "옳은 일을 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내게 이 일을 해결할 능력이 있기를 바란다"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로젠블루스 판사는 이날 6개 혐의 중 강도 혐의에 대해선 범죄로 볼 만한 상당한 이유가 없다고 잠정적으로 판단했다. 안 씨가 범죄로 '이익'(profit)을 보려 한 정황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안 씨 등은 북한대사관에서 컴퓨터와 하드디스크, USB, 휴대폰 등을 들고 나왔는데, 미국으로 돌아와 연방수사국(FBI)에 모두 제출했다.

로젠블루스 판사는 최종 결정을 내린 뒤 양측에 통보할 예정이라고 변호인단은 밝혔다.

안 씨는 심리를 마친 뒤 취재진에게 "진실과 논리, 상식을 믿는다"면서 "재판장이 옳은 결정을 내려주기를 기도하지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이해한다"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LA)=박현영 특파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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