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이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김포공항에서 이민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의 심정은 아마 세 가지쯤 될 것 같다. 1960년대, 70년대의 얘기다.
하나는 그 지긋지긋한 「북괴 남침위협」으로부터 제발 벗어났으면 하는 소망이다. 지금은 좀 다르지만 그때만 해도 그것은 실감나는 일이었다. 참혹한 전쟁을 겪은 기억이 너무도 생생한 우리는 전쟁에 대한 느낌이 남다르다.
또 하나는 돈 좀 많이 벌어보았으면 하는 기대다. 미국은 우리에게까지도 기회의 나라로 인상지어져 있다. 사실 미국에 가서 돈 번 한국사람들은 적지 않다. 분명 그들에겐 기회의 나라였다. 다만 돈 버는 방식이 좀 다를 뿐이다.
가령 뉴욕에서 50년 터잡은 유대인들을 밀어내고 한국교포들이 야채장사로 성공하기까지는 새벽2시에 일어나 서울서 대전 가기 만한 거리의 채소밭을 찾아가 장을 보아야한다. 그 야채를 겨울이면 찬물에 손 담그며 씻고 랩에 포장해서 가게에 내놓아야 한다. 이런 고생을 달게 이겨내야 성공의 손을 간신히 잡을 수 있다.
기름과 비눗가루 냄새를 견뎌야 하는 세탁소의 역겨움, 언어의 절벽, 인종차별의 차가운 눈길, 밤낮없이 쫓기는 시간, 시간. 그 모든 것을 견뎌내는 한국 사람들은 제2의 유대인이라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들었다.
그때 이민 보따리를 싼 사람들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자녀들의 교육문제다. 입시가 지옥으로 통하던 악몽 말고도 과외공부를 감당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미국은 적어도 두 가지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바로 그때 모진 마음먹고 이민 떠난 사람들이 요즘 돌아오는 경우가 많은가 보다. 외무부의 통계에 따르면 이민을 떠나는 사람의 수는 해마다 줄어 올해는 2만명 선을 예상하고 있다. 지난 80년까지도 그 수는 3만7천5백 명에 달했다. 그 대신 다시 돌아오는 교민들의 수는 지난해의 경우 5천명에 가까운 4천7백34명이었다. 역시 80년도의 경우 그 수는 1천명정도였다.
그럼 우리의 환경은 그때보다 좋아진 것일까. 「북괴의 위협」은 줄어들였고,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고, 과외공부와 대학입시의 괴로움은 얼마나 해소되었을까. 되돌아오는 교민들에게 우리는 무슨 대담을 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