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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담장에 꽃 그림 그린 고려 때 이슬람 귀화인 장순룡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43)

많은 사람이 궁궐에 가면 우선 큰 전각의 건물 규모에 압도당하고 유명한 이름 치레를 하는 곳을 둘러보고 온다. 그나마 안내자가 있어 그 의미를 알고 보는 궁궐 나들이는 그런대로 이야기가 있어 좋겠지만 작년부터 휘몰아치는 코로나19 사태는 궁궐의 해설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여러 사람이 모일 수 없는 상황이니 당분간은 해설사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기 보다는 혼자 즐기는 방식이 좋겠다. 지금이야말로 내가 주관할 수 있는 시간에 발길 닿는 대로 호젓한 궁궐나들이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면 더욱 긍정적이다.

더 나아가 옛날 그 곳에 살았던 옛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궁궐나들이를 해보면, 오래되고 역사적 의미로만 인식되던 궁궐이 우리 마음 가까이 자리 잡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궁궐의 전체를 휘익 둘러보는 것 보다 느린 걸음으로 어느 한 곳에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는 재미를 느껴보기를 권하면서, 우리 전통문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국인의 꽃담

경복궁 자경전 황토담을 따라 난 길. [중앙포토]

경복궁 자경전 황토담을 따라 난 길. [중앙포토]

우리 조상은 예부터 집의 벽체나 담장에 여러 가지 무늬를 놓아 독특한 치레를 했는데 한자로는 이를 화초장(花草墻)이라 하고 흔히 꽃담이라고 불렀다. 문헌에는 회면벽(繪面壁), 회벽화장(繪壁華墻), 화문장(華汶墻), 영롱장(玲瓏墻)이라 기록되어 있고, 화담(花墻), 화초담(花草墻), 화문담(花汶墻)으로 불리기도 했다. 여러 가지 재료로 길상 문자나 무늬를 넣어 치장한 담장이 바로 꽃담이다. 옛 사람들은 일반 서민에서부터 양반가나 궁궐에 이르기까지 담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민가의 담장에서는 흔하게 구할 수 있는 흙이나 돌, 기와 조각을 이용해 수수한 꽃담치레로 소박한 멋을 보여주는 아름다움이 있고 궁궐 건축에 나타나는 꽃담은 절제된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미술 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최초의 꽃담에 관한 기록으로 고려시대에 장가장(張家墻)이라는 유명한 꽃담이 있었는데, 아랍인으로 고려에 귀화해 권세를 누리던 장순룡(1254~1297)은 집 담을 쌓을 때 화초 무늬를 넣어 꾸몄다.

『고려사』 권123, 열전 권36 장순룡조(張舜龍條)

장순룡은 본래 회회인(回回人)이었다. 초명(初名)은 삼가(三哥)로 아비가 원나라 세조(世祖)를 섬겨 필도지(고려 때 정방에서 서기 일을 맡아보던 관원을 몽고에서 이르던 말)가 되었다. 장순룡은 제국공주(齊國公主)의 겁령구(怯怜口)로 와서 낭장(郞將)을 받고 여러 번 승진해 장군이 되어 지금의 성명으로 바꾸었다. 장순룡은 인후(印侯), 차신(車信)과 권세를 다투고  집을 몹시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지었는데 기와와 조약돌로 바깥 담장을 쌓으면서 화초의 형상으로 무늬를 놓았다. 그 때 ‘장가(張家)네 담장’이라고 불렀다.

張舜龍 本回回人 初名三哥 父卿事元世祖爲必?赤 舜龍以齊國公主怯怜口來 授郞將 累遷將軍 改今姓名…舜龍與印侯車信爭權 競爲奢靡 起第宅極侈麗 以瓦礫築外垣 狀花草以爲文 時稱張家墻
* 장순룡(1254~1297): 회회(回回)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셍게(三哥)이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공조(工曹)에 소속된 와서(瓦署)에서 왕실에 필요한 각종 기와와 벽돌을 구워 만드는 것을 전담했다. 와서에서 생산된 기와는 대와(大瓦), 방초(防草. 지붕 마루의 좌우 끝에 끼우는 막새기와), 상와(常瓦. 일반기와), 토수(吐首), 잡상(雜像), 용두(龍頭), 연가잡상(煙家雜像)등이고, 방전(方甎.네모반듯한 벽돌), 대방전, 반방전(半方塼) 등의 전돌이다. 와서에서 각종 전돌을 구웠다는 기록을 보면 필요에 따라 궁궐의 꽃담 제작 시에 특수 형태의 전돌을 구워서 공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꽃으로 수놓은 소망 꽃담

경복궁 자경전의 담을 따라 걷다 보면 꽃 나무 등이 부조된 꽃담도 볼 수 있다. 사진은 자경전 뒤뜰 굴뚝에 있는 십장생 부조. [중앙포토]

경복궁 자경전의 담을 따라 걷다 보면 꽃 나무 등이 부조된 꽃담도 볼 수 있다. 사진은 자경전 뒤뜰 굴뚝에 있는 십장생 부조. [중앙포토]

궁궐의 꽃담은 그 꾸밈이 섬세하고 품격이 있다. 그리고 꽃 하나하나에는 저마다의 다른 향기가 있다. 틀에 찍어 손쉽게 만들어내는 일률적인 치장이 아니다. 꽃마다 다르게 심어 놓은 꽃술은 얼마나 섬세한지 놀랍지 않은가? 그리고 백 년 전 누군가 담장에 그려놓은 그런 작은 정성에 우리는 감동한다.

궁궐 꽃담을 보면 우선 벽체의 두께가 상당히 두터운데 중심 벽체는 전통 벽 쌓기를 한 후 문양을 놓아 꽃담 치장을 한다. 꽃담의 제작에 쓰이는 주재료는 벽돌, 문양전, 삼화토(三和土)이다. 삼화토는 말 그대로 세 종류의 흙을 섞어 만든 혼합 재료로 석회와 흙, 석비레(모래)를 대략 1 대 1 대 1로 섞어 물 배합을 하여 만든 몰탈(mortar)을 말한다. 담장에 넣는 곡선 문양에는 기와가 쓰이기도 하는 데 민가에서는 일반 기와를 적당히 깨어서 쓰기도 하지만 궁궐의 꽃담에는 따로 형태를 제작해서 쓴 것으로 보인다. 꽃담이 아름다운 것은 꾸며진 문양의 의미나 형상이 그 당시 최고의 장인에 의해 제작된 회화성이 뛰어난 작품이라는 이유도 있다.

궁궐의 담장에서 보여지는 비례감과 색의 조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면, 궁궐 담쌓기에는 사고석(사괴석‧四塊石)과 벽돌을 함께 쓰는데, 담 아랫부분은 큰 돌을 쓰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배열한다. 그리고 좁은 폭의 벽돌을 윗부분에 배치해서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고석과 벽돌 테두리에 삼화토로 화장 줄을 치는데 이때에도 역시 돌이나 벽돌의 면 크기에 따라 화장 줄의 간격을 조정한다. 그리고 가로선으로 쌓여진 담장을 마무리하는 맨 꼭대기 선에는 담장 기와의 촘촘한 세로선이 수평의 벽선에 변화를 주고 있다.

경복궁의 교태전과 자경전의 꽃담에는 문양전과 함께 붉은 색 벽돌을 주로 썼다. 경복궁의 꽃담은 화장 줄의 삼화토 흰색과 벽돌의 붉은 색이 아주 화려한 색 조화를 이룬다. 재미있는 것은 붉은 색 벽돌이 주재료인 듯 생각될 수도 있으나 눈여겨보면 붉은 벽돌과 흰색 화장 줄은 서로 1 대 1 비례이거나 2 대 1의 비례로 어느 한쪽도 소홀해 질 수 없는 절대적인 비례감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비례감에 의해 이루어지는 색면의 조화에서 채도가 높은 붉은 색과 무채색의 흰색은 더욱 산뜻한 조화를 보여준다. 조금 거리를 떼고 꽃담을 바라보았을 때 전체 색의 조화가 화려하면서도 산뜻해 보이는 이유가 이러한 색과 비례감의 조화에서 오는 것이다. 그 세련된 비례감은 창덕궁이나 덕수궁의 꽃담에 쓰인 검은 벽돌과 삼화토의 흑백 대비에서도 반감되지 않는다. 경복궁의 꽃담에 나타나는 화려하고 따뜻한 조화감이 창덕궁과 덕수궁에서는 흑백의 대비에 의한 궁궐의 또 다른 기품을 보여주고 있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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