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오래]하루 3부제 수업, 야간 보충…조선 왕세자는 공부벌레

중앙일보

입력 2021.04.25 13:00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41)

인조는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식을 준비하면서 왕세자가 쓸 책상을 만들라고 명했지만 예조에서 왕의 명을 거부했다. 왕세자라고 할지라도 이날만큼은 스승 앞에서 한 사람의 학생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서 이덕화가 연기한 인조. [사진 드라마하우스]

인조는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식을 준비하면서 왕세자가 쓸 책상을 만들라고 명했지만 예조에서 왕의 명을 거부했다. 왕세자라고 할지라도 이날만큼은 스승 앞에서 한 사람의 학생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서 이덕화가 연기한 인조. [사진 드라마하우스]

왕세자 교육 

조선시대 선비들이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서 추구했던 이상적 군왕은 안으로 덕성을 갖추고 밖으로 덕행을 실천하는 유덕자로서의 군주였다.

따라서 왕도정치의 중심에 있는 군주는 공부를 통해 인격체로서의 덕성을 함양하고, 통치로 백성들에게 덕행을 펼치는 성인이 되어야 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받았다. 군주가 성인의 왕도를 실천하여 덕화를 펼치면, 백성들이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차 왕위에 오를 왕세자 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시되었다.

왕세자의 하루는 왕과 왕비 등 왕실 어른들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미래 국왕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전부였다. 조선시대 효를 바탕으로 하는 세자의 좋은 품성을 키우는 교육으로 세자는 우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는 방법을 익히는데, 시선(視膳)과 시탕(侍湯)이 그 시작이었다.

어린 왕세자는 아침마다 왕의 수라상을 미리 살피는 시선과 병환 중에는 약시중을 드는 시탕을 하고, 매일 문안과 함께 부모의 침식을 살피는 절차를 배웠다. 영조는 수십 년간 부친 숙종과 형인 경종의 시탕을 했다. 왕세자의 교육은 시선과 시탕을 마친 다음에야 비로소 조강이 시작되었다. 왕세자가 글을 배운 후 가장 먼저 쓰는 것이 문안 편지이며 글씨를 쓸 수 있게 되면 ‘효(孝)’를 제일 먼저 쓴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식견과 능력을 함양하는 교육을 받는다.

조선시대 왕세자는 출생 이전의 태교에서부터 나이가 다섯 살 무렵부터 문자 교육, 경전교육, 의례교육 등에 이르기까지 왕세자의 일상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모든 것을 교육으로 채우고 있었다. 평균 5세 정도에 강학청(講學廳)이 설치되어 조기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초학의 교재는 효경소략, 소학초략, 소학, 동몽선습이 많았고, 8살 이후 대학을 시작으로 사서삼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실시된 왕세자 교육의 결과는 마냥 성공적이지는 못하였다.

왕세자 입학식

세자는 책봉된 직후에 성균관 입학례를 행한다. 왕세자는 스승에게 제자로서의 예를 깍듯이 차려야만 했다. 왕세자가 성균관에서 입학례를 치를 때, 왕세자에게는 책상이 제공되지 않았다. 스승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바닥에 놓인 책을 읽어야만 했다. 인조는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식을 준비하면서 왕세자가 쓸 책상을 만들라고 명했지만 예조에서 왕의 명을 거부했다. 왕세자라고 할지라도 이날만큼은 스승 앞에서 한 사람의 학생이기 때문이다. 서연에서도 왕세자는 스승께 먼저 인사를 하고 스승이 먼저 앉은 다음에 자리에 앉아 깎듯한 예를 취했다.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례는 좋은 날을 잡아 성균관에 가서 공자에게 절하고 교수관인 박사에게 제자의 예를 행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왕세자가 실제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왕세자는 성균관 입학례를 거행한 뒤 세자시강원 관료들의 지도 아래 교육을 받았다. 장차 나라의 보위를 이을 왕세자를 교육시키기 위해 세자시강원에는 당대 제일의 학자들이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이때 의정부의 관료가 사부를, 중추부(中樞府)가 빈객(賓客)을 맡아 소조(小朝)를 구성하였다. 세자의 스승으로 사(師)는 정1품 최고위직인 영의정이, 부(傅)는 좌의정과 우의정 중에서 한명, 이사(貳師)는 종1품의 찬성(贊成)이 겸임했고 좌·우빈객(左·右賓客. 정2품)은 중추부의 관원 중 두 명이 임명되었다. 왕세자의 교육을 위해 조선사회를 움직이는 수뇌부가 총동원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세자와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교육을 시키는 사람들은 보덕 이하의 전임관료들이었다. 전임관료는 보덕(輔德. 정3품) 1명, 필선(弼善. 정4품) 1명, 문학(文學. 정5품) 1명, 사서(司書. 정6품) 1명, 정7품의 설서(說書. 정7품) 1명 등 5명이다.

◆ 세종실록/ 세종 9년(1427) 10월 14일 4번째 기사

경서를 처음 읽는 날 등에 사부와 이사가 회강하도록 서연에 전지하다

서연(書筵)에 전지하기를, “매월 초1일, 11일, 21일 및 경서를 처음 읽는 날에는 사부(師傅)와 이사(貳師)가 회강(會講)하라” 하였다.

조선의 왕세자들은 다섯 살 무렵부터 제왕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주로 한자공부나 유학에 관한 내용으로 ‘하루 3번 45분씩 수업’이 진행되었다. [사진 pixnio]

조선의 왕세자들은 다섯 살 무렵부터 제왕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주로 한자공부나 유학에 관한 내용으로 ‘하루 3번 45분씩 수업’이 진행되었다. [사진 pixnio]

동궁은 하나의 작은 기숙학교였다. 왕세자가 되면 서연(書筵)을 열어 하루 3번의 공부를 하고 오후 보충, 야간 보충학습도 받아야 했다. 세자시강원의 스승들은 교대로 숙직하면서 24시간 왕세자의 학습을 지도했다. 수업 방식으로 정규 강의인 법강(法講)은 아침 공부인 조강(朝講. 해뜰 무렵), 낮 공부인 주강(晝講. 정오 무렵), 저녁 공부인 석강(夕講. 오후 2시경)으로 계속 이어졌다. 보충학습으로 낮 시간의 소대(召對)와 밤의 야대(夜對)가 있었다. 그리고 회강(會講)은 한 달에 두 세 번씩 진행되는데 왕세자가 스승과 여러 관원들 앞에서 경사(經史)와 그 밖의 공부한 내용에 대하여 복습하던 일이다. 왕세자가 매일 수업이 시작할 때는 전날 배운 것을 완벽히 외워야만 진도를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회강에는 임금도 참석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국왕은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공부가 늘었는지 지켜보았다.

스무 명의 스승이 가르치다

조선의 왕세자들은 다섯 살 무렵부터 제왕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주로 한자공부나 유학에 관한 내용으로 ‘하루 3번 45분씩 수업’이 진행되었다. 8살의 어린 나이부터 하루 7시간 이상은 꼬박 공부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소현세자의 스승은 세자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자, “눈을 이리저리 돌리는 것은 마음을 다잡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라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왕세자의 학습이 부진하면 스승은 가차 없이 질책하여 자세를 다잡게 했다. 1628년 10월 2일 조강례에서 좌빈객 김상용은 소현세자가 강학한 책을 30번 읽는다고 답하자 반드시 100번 넘게 읽은 뒤라야 글 뜻에 통달하게 될 것이라고 권했다.

영조는 엄청난 교육열을 가진 아버지였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영조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부자 관계는 점점 멀어지고 결국 비극으로 치달았다. 보물 제932호 영조 어진. [사진 Wikimedia Commons]

영조는 엄청난 교육열을 가진 아버지였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영조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부자 관계는 점점 멀어지고 결국 비극으로 치달았다. 보물 제932호 영조 어진. [사진 Wikimedia Commons]

세자가 공부하는 교재는 소학, 효경,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대학연의, 상서, 주역, 예기, 춘추좌전, 통감강목 등이 이용된다. 시강원 관료들은 온종일 세자의 주변을 돌며 유교이념을 반목, 주입시켰다. 영조는 손자 정조를 교육할 때, “내가 일찍이 소학을 100여 번 읽었기 때문에 지금도 기억하여 욀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암기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왕세자 교육은 경전의 문구를 보지 않고 통째로 외우는 암기를 기본으로 했다. 유학에서 암기는 경전 이해를 위한 첫걸음으로 암기하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이 전통 교육의 철학이었다.

그리고 왕세자는 학문 뿐 아니라 지덕체가 균형을 이루는 교양 교육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조선의 사대부가 갖춰야할 기본 교양으로서의 육예(六藝)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로 구성된다. 예는 예법, 악은 음악, 사는 활쏘기, 어는 말타기, 서는 글쓰기, 수는 수학을 의미한다. 왕세자는 육예에 고루 능한 교양인으로 성장해야 했다.

영조는 엄청난 교육열을 가진 아버지였다. 영조는 아들이 뛰어난 학식을 갖춘 군주로 성장하기를 원했기에 세 살 때부터 조기교육을 시작했으며 자신이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영조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부왕의 미움에 세자는 신경증과 불안에 시달리면서 부자 관계는 점점 멀어지고 결국 비극으로 치달았다.

부자간의 갈등은 노년의 영조에게 마음 아픈 일이었을 것이고 아들에 대한 조급하고 과도했던 교육열은 손자 정조를 대하면서 한결 여유 있고 너그러워졌다. 물론 정조가 사도세자보다는 훨씬 영민하고 학구적인 성향을 가진 인성이었기에 정조는 할아버지 밑에서 뛰어난 학식을 지닌 군주로 성장했다. 아버지의 비극을 어린 시절 목격했던 정조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처신해야하는지 알고 있었고 절대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공부에 몰두했다. 정조는 문무를 겸비한 군주였다. 개인문집 홍재전서를 180여권, 4000여권의 서적을 편찬할 정도로 뛰어난 학식을 자랑했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에는 50발을 쏴서 49발을 명중시킬 정도였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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