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조선왕조의 몰락 예고한 효명세자의 죽음

중앙일보

입력 2021.05.09 13:00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42)

왕세자의 대리청정

대부분의 왕통승계는 선왕의 승하 후 사왕(嗣王)으로 즉위하고 국정을 다스리게 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왕세자가 왕명에 따라 국정 업무를 대리로 처결하는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기도 했다. 대리청정이란 왕세자가 왕을 대신해 정치를 하는 일을 이르던 말이다. 조선시대에 왕세자가 왕명을 받들어 공식적으로 정치에 간여한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 신하들은 잠재적 왕위 계승권자인 왕세자를 저하(邸下)라고 부르고 칭신(稱臣, 스스로 신하로 자처함)해 신하의 예를 취했다. 왕세자가 국왕을 대신해 국정을 보는 대리청정은 보통 왕이 병들어 정사를 살필 수 없거나, 노년에 격무를 감당할 수 없는 경우 또는 국난을 당해 세자에게 위임통치를 시킬 때에 행해졌다.

세종은 재위 말년에 격무를 덜기 위해 왕세자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으며, 선조는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해 급박한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다. 광해군의 왕세자 책봉은 임진왜란의 다급한 상황 속에 이루어진 선조의 원치 않는 선택이었다. 선조는 무엇보다 광해군이 적자가 아닌 것에 대한 부담감으로 왕세자 책봉을 계속 미루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결국 광해군을 세자로 세울 수밖에 없었다. 선조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당시 전쟁으로 급박해진 나라 사정은 광해군으로 하여금 분조(分朝. 군국의 기무를 동궁에게 맡기는 일)를 이끌게 했다. 분조란 조정을 둘로 나누었다는 뜻으로 세자가 이끄는 별도의 정부로 전쟁이 끝나면 해체되는 임시기구였다. 그리고 광해군은 왜란으로 나라가 위급해진 때에 전국을 돌면서 흩어진 민심을 추스르고 와해된 국가의 기능을 수습하는데 탁월한 공을 세웠다. 국왕이 백성과 나라를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 상황에서 민심이 이반할 것을 두려워한 선조의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이렇게 왕세자 광해군이 국왕을 대신해 분조를 이끌고 정국을 수습하는 일은 평화기의 다른 왕세자들이 경험하지 못했다. 광해군은 즉위 후 전쟁 시의 경험으로 명‧청간의 등거리 외교로 실리를 추구하는 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의 실리외교는 성리학적 명분논리에 밀려 조선은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고, 다시 한 번 외침으로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분조를 이끌고 전주로 가 국정을 처결했고, 병자호란 때는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고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비극으로 끝난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으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로 정신 분열증을 앓았고 1757년 7월부터 11월까지 넉 달 동안 문안인사조차 드리지 않았다. 사진은 유아인이 연기한 사도세자. [사진 영화 '사도' 스틸]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으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로 정신 분열증을 앓았고 1757년 7월부터 11월까지 넉 달 동안 문안인사조차 드리지 않았다. 사진은 유아인이 연기한 사도세자. [사진 영화 '사도' 스틸]

영조는 사도세자가 15세 때인 1749년(영조 25년)에 대리청정을 명했다. 왕세자의 대리청정기간 동안 두 부자 사이는 완전히 갈라지는 파국을 맞게 되었다. 세자의 정치적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한 대리청정이었지만 민감한 사안은 영조의 판단에 따라 결정했고 이 지점에서 부왕과 왕세자의 갈등은 높아만 갔다. 세자는 대리청정 기간 중 이인좌의 난 이후 꾸준히 요구된 소론계 인사들에 대한 연좌제 처벌을 반대하고, 소론계 인사들을 등용해 노론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켜는 부왕 영조와의 마찰을 불렀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의심하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닦달했으며, 부왕의 냉대 속에 세자는 점점 자신감을 잃고 병들어갔다. 영조는 늘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세자에게 불만을 품었고, 시시때때로 양위선언을 해 아들을 괴롭혔다. 임금의 양위선언은 정국을 전환하기 위한 시도일 때도 있겠지만  당사자인 세자와 신하들은 목숨을 걸고 만류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는 대신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고 왕의 권위를 확인시키려는 차원의 포석이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이전에도 영조는 이미 다섯 차례나 양위 선언을 했다. 어린 세자는 그때마다 석고대죄를 통해 양위를 철회해줄 것을 애원했다. 그런데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뒤 다시 세 차례나 양위를 선언해 분란을 일으켰다. 대리청정 3년째인 영조 28년(1752) 12월 영조가 양위를 선언하자 당시 홍역을 앓고 있던 사도세자는 병색이 채 가시지 않은 몸으로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 석고대죄를 해야만 했다.

당시 사도세자는 왕이 입시(入侍)하라는 명령만 들으면 두려워 벌벌 떨며, 쉽게 알고 있는 일도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정신 분열증을 앓던 사도세자는 1757년 7월부터 11월까지 넉 달 동안 문안인사조차 드리지 않았다. 그렇게 세자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던 1762년(영조 38년) 5월 22일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10여 조에 걸쳐 고발했고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그리고 윤5월 13일 영조는 드디어 세자를 폐하며 서인으로 삼고, 뒤주 속에 가두었다. 8일 뒤 세자는 뒤주 안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다시 친정체제를 펼친 영조는 재위말년 세손에게 양위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이 양위를 만류하자 1775년 11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 했다. 홍인한이 “동궁은 노론·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병조판서에 누가 좋은지를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욱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내세우며 반대했다. 홍인한 등이 끝까지 방해했으나 영조는 한 달 뒤인 12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고 곧이어 병권을 움직일 수 있는 감국권과 부절, 승인권한 역시 세손에게 넘겨주었다. 이듬해 1776년 3월 영조가 승하하자 대보(大寶)를 세손에게 전하라는 왕의 유교(遺敎)에 따라 정조가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했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과 안타까운 요절

효명세자는 어린 나이에도 단호한 일처리로 조정의 기강을 잡았다. 사진은 박보검이 연기한 효명세자. [사진 구르미그린달빛 문전사, KBS미디어]

효명세자는 어린 나이에도 단호한 일처리로 조정의 기강을 잡았다. 사진은 박보검이 연기한 효명세자. [사진 구르미그린달빛 문전사, KBS미디어]

1827년(순조 27년) 2월에는 순조의 명으로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해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코자 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때는 남공철, 김재찬, 한용귀, 김사목, 이상황, 심상규 등 당시의 중신들이 전부 두 팔을 벌려 환영하며 ‘찬양’했다고 실록에 표현될 정도였다. 영조가 정조의 대리청정을 명했을 때와는 매우 다른 분위기였다. 이에 처가인 풍양 조씨와 다른 당파의 인물들을 중용했으며 특히 이인좌의 난 이후 축출됐던 소론계열 인사까지 등용했다. 효명세자는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일처리로 조정의 기강을 잡았다. 어느 수령이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소리가 들리자 엄한 벌을 내리며 단속하기도 했다. 심지어 정승도 마음대로 제수하는 등 대리청정에 걸맞는 활동을 보여주었다. 이때 기용된 인물 중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시조로 불리는 박규수다.

효명세자는 1828년에 창덕궁 안에 사대부의 집을 본 따 연경당(演慶堂)을 건립했다. 사대부들의 학구열을 궁 안에 도입하는 한 편, 부왕인 순조가 존호를 받는 행사를 치를 목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표현하고 아버지 순조의 권위를 높이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으로 순조의 탄신 진연 등의 주요 연회를 성대하게 개최했다. 이 연회의 핵심에는 ‘정재’라고 불리는 궁중 무용이 있었는데 효명세자는 직접 정재의 대부분을 수정하거나 다듬는 등 예술에도 재능을 보였다. 칼춤에 쓰이는 칼날과 손잡이가 따로 노는 독특한 구조의 칼을 도입한 사람도 효명이다. 효명세자는 글과 춤을 좋아해 직접 무용 춘앵전을 편곡하기도 하였는데, 예악(禮樂. 예의와 음악)은 정치의 근본으로 여겨졌으며 임금들은 예악에 관심을 쏟았다.

효명세자는 노론 내 다른 정차들과 일부 소론까지 중용해 일각에서는 그가 왕권을 강화하고, 국정을 쇄신하리라는 기대를 하였다. 그러나 1830년(순조 30년) 효명세자는 갑자기 병에 걸렸고, 그 해 5월 창덕궁 대조전에서 불과 22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1834년 순조가 승하하자 여덟 살의 어린 왕세손(헌종)이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했다. 그리고 헌종 역시 아버지 효명세자처럼 23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효명세자의 죽음은 마치 조선왕조의 내리막길을 예견하는 것 같은 비극이었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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