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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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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현예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김현예 P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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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목이 무성한 경기도 기흥의 한 야산.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이 산을 깎아 6개월 안에 공장을 마치라”는 지시를 내린다. 산을 깎아 세울 공장에서 만드는 건 반도체. 1983년 기공식 직후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른바 모든 걸 동시에 쏟아붓는 ‘동기화(同期化)’ 전략으로 공장을 짓기 위해 단계별로 이뤄져야 하는 것을 ‘동시에’ 했다. 가령 전기공사와 수로 공사, 골조 공사를 같이하는 식이다.

당시 삼성은 야무진 신입사원을 뽑아 반도체 설비회사로 파견을 보냈다. 설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시작부터 끝까지 보고 ‘장비와 함께’ 귀국하도록 하면, 장비 설치나 초기 가동에 어려움을 줄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한번은 기흥 공장에 장비를 들여와야 하는데 자갈길이 문제가 됐다. 장비를 들여오기 위해 4㎞에 달하는 자갈길을 반나절 만에 매끈한 도로로 포장한 이야기는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한다.

20일(현지시각) 미국 상무부가 삼성전자와 인텔, TSMC 등이 참석한 가운데 반도체 대책 회의를 연다. 지난 4월 백악관 반도체 회의 이후 약 한 달 만이다. 당시 회의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반도체 웨이퍼를 들어 보였다. 반도체 투자가 2조 달러 규모의 인프라 투자 계획인 미국 일자리 계획의 핵심으로 “어제의 인프라를 수리할 게 아닌, 오늘의 인프라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미국에 투자하라는 묵직한 시그널이다. 미국 주도로 열리는 두 번째 대책회의는 공교롭게도 양국 정상회담 하루 전 열린다.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길에 동행한 국내 기업들의 투자 규모가 40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이야기도 새어 나오고 있다. 바이든이 내민 청구서에 우리 기업들이 화답하는 모양새인 셈이다.

그 청구서엔 압박만 있는 게 아니다. 당근도 있다. 미국은 5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56조원이 넘는 반도체 산업 지원금을 책정해놨다. 세제 지원 카드도 마련했다. 말하자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한 바이든의 ‘동기화’ 전략이다.

국가 명운을 건 반도체 경쟁에 우리는 어떨까. 우리는 오는 2030년까지 ‘기업’이 510조원 규모의 투자를 진행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를 두고 ‘K반도체 전략’이라고 발표했지만, 한국이 해서 K가 아니라 오로지 한국만이 할 수 있는 국가 전략이 있어야 진짜 K가 되지 않을까.

김현예 P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