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물의 가족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빗점골에 갔다가 목이 말라 엎드려 계곡 물을 마십니다. 이처럼 맑은 물 한 모금을 위하여 지리산에 사는지도 모르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도 맛있는 음식은 맑은 공기와 물입니다. 간사한 혓바닥의 진수성찬은 그 다음이지요.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智者樂水)라 했던가요.

맑은 물일수록 냄새나 모양이 없습니다. 물의 몸은 언제나 텅 비어 있어 아무 걸림이 없는 무애행의 수행자이지요. 흐르다 바위를 만나면 에돌아가고, 벼랑을 만나면 산산이 부서지며 온몸을 날리지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곡의 물봉숭아 꽃을 피우고, 어린 물고기들에게 젖을 물리다가 마침내 온 몸으로 인간의 똥오줌을 받아냅니다.

하지만 물은 누구를 탓하거나 욕하지 않습니다. 온갖 더러운 냄새며 색깔을 받아들여 스스로 정화시킬 뿐, 물은 저의 몸을 학대하지도 않지요. 이 세상의 모든 물은 흐르는 거울,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세수할 때마다 마주치는 물의 얼굴은 그대의 얼굴, 물의 눈동자는 바로 그대의 눈동자. 우리 몸의 7할이 물이니 우리는 모두 물의 가족입니다.

이원규 <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