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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체류 노동 10년 뒤 1400만원 퇴직금 소송…필리핀 아재가 이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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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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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인천국제공항. 필리핀행 비행기의 탑승 시간이 다가왔지만, 라모스(가명·50)씨는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10여년간 일한 한국에 대한 서운함과 회한이 몰려왔다. 비행기에 오른 뒤에도 “10년 넘게 사장을 위해 헌신했다. 대가가 겨우 이건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건추적]

라모스씨는 10년 넘게 일한 공장에서 퇴직금을 받지 못한 채 귀향하는 길이었다.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귀국을 택했지만, 기대했던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억울했다. 불법체류자로 10년 일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국땅에서 한 노동의 대가를 요구해야 하는 걸까. 그의 결심은 4년에 걸친 퇴직금 소송으로 이어졌다.

10년 불법체류 노동 뒤 퇴직금 갈등

라모스는 2007년 한국에 들어왔다. 필리핀에서는 부인과 함께 세 남매를 키우면서 목돈을 마련할 수 없었기에 한국행을 결심했다. 2007년 9월 관광비자로 한국 땅을 밟았고 이듬해 3월 경기도 포천시의 한 섬유공장에 둥지를 틀었다. 원단 생산을 하는 일을 한 그의 첫 월급은 150만원이었다. 불법체류자 신분이 됐기에 근로계약서도, 4대 보험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에 능숙해졌다. 2년마다 월급이 10만원씩 올라 어느덧 최저임금을 초과하더니 일부 한국인 노동자의 봉급을 넘어섰다. 근로계약서는 없었지만, 매달 220만원의 월급이 감사했다. 매일 10시간 넘게 공장 내 갖은 잡무를 도맡았다. 오로지 가족을 생각하며 버틴 시간이었다.

10년의 불법체류 노동. 그 끝에 반가운 소식이 고국에서 날아왔다. 아들이 결혼을 앞뒀고, 딸은 곧 대학을 졸업하게 됐다. ‘이제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불법체류자 생활도 끝내고 싶었다. 퇴직을 결심하자 회사 사장은 뜻밖에 불같이 화를 냈다.

라모스씨는 “사장님이 퇴직금 지급을 피하려는 듯 화를 내며 빨리 떠나라고 압박했다”고 회고했다. 퇴직금에 대한 둘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사장은 라모스씨 요청으로 2010년 12월부터 퇴직금을 매월 월급과 함께 줬다고 주장했다. 라모스씨는 약 1400만원의 퇴직금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들의 결혼식 날짜가 다가왔고, 일단 퇴직금을 받지 못한 채 필리핀으로 돌아갔다.

한국에 남은 권리 찾으려 퇴직금 소송

퇴직금 소송 관련한 A씨의 진술서. 이재승 변호사 제공

퇴직금 소송 관련한 A씨의 진술서. 이재승 변호사 제공

한국은 떠났지만, 라모스씨는 한국에 남아 있는 자신의 권리를 찾고 싶었다. 지인의 도움을 받아 중부지방고용노동청에 진정을 넣었다. 한국의 법원은 회사 사장에게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위반죄를 적용해 벌금 100만원의 약식명령을 내렸다. 자신감이 생긴 라모스씨는 퇴직금 약 1400만원과 지연 손해금을 달라며 사장을 상대로 퇴직금 청구소송을 냈다. 지인을 통해 대한법률구조공단의 도움을 받았다. 사장도 먼저 받은 퇴직금은 부당이득이라며 반환 소송으로 맞섰다.

지난해 4월 의정부지법 포천시법원은 라모스씨와 사장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사실상 라모스씨의 패소였다. 재판부는 불법체류자인 그가 불시에 강제 출국 등을 당할 우려가 높고, 따라서 퇴직금 사후정산이 어려워 수시 정산을 요구했을 개연성이 크며, 내국인 근로자보다 더 많이 받은 월급의 차액이 퇴직 금액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라모스씨는 항소했다.

“퇴직금 선지급 계약서 없다” 1심 뒤집은 2심

의정부지법 전경. 연합뉴스

의정부지법 전경. 연합뉴스

2심 법원은 1심 판결을 뒤집고 라모스씨의 손을 들어줬다. 의정부지법 민사1부(김명한 재판장)는 지난 22일 사장에게 퇴직금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재판부는 퇴직 전 퇴직금 청구권을 노동자가 포기하는 것은 중간정산으로 인정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무효라고 본 선행 사례, 퇴직금 선지급을 인정할 수 있는 사항이 적힌 근로계약서가 없는 점 등을 판단의 근거로 제시했다. 재판부는 “라모스씨가 불시에 강제 출국을 당할 수 있다는 사정만으로 퇴직금 분할 약정을 맺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재승 대한법률구조공단 변호사는 “사장은 퇴직금 내용이 적힌 월급 명세서를 증거로 제출했지만, 라모스씨는 본 적이 없는 명세서였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라모스씨의 소송 등을 도운 한석규(72)씨는 “소송이 오래 진행되면서 그동안 반포기 상태였다. 가족을 위해 한국에서 10년 넘게 고생했는데 이제는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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