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딴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박진석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담당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얼마나 오래 뒹굴었는지 모른다. 지난 세기말 기자는 눈물을 훔치고 배꼽을 잡으면서 바닥에 연신 쓰러졌다. 기자뿐만이 아니었다. 신문명이었던 인터넷의 총아 ‘딴지일보’를 처음 접한 젊은이들은 대부분 정좌(正坐)와는 거리가 먼 자세로 그 콘텐트를 소비했다.

전에 없던 기상천외한 문체에 진보 양념을 곁들여 기성 권위에 끊임없이 딴지를 걸었던 그 매체는 젊은 층의 열광적 반응을 끌어냈다. 열광의 원인 중 하나는 가벼움이었다. 그 매체, 그리고 ‘털보 총수’는 진지한 체하지 않았다. 만만치 않은 담론도 폭소와 실소, 조소를 곁들여 한없이 가볍게 만들었다.

배설기관을 뜻하는 속어를 남발하고 한국 대표 욕설을 감탄사처럼 써먹으며 사실과 억측이 뒤섞인 음모론을 제멋대로 떠들어댔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은 이유다. 그 가벼움은 총수가 성인용품을 팔든, 무슨 짓을 하든 면죄부로 작용했다.

2010년대 신병기인 팟캐스트를 들고 돌아온 그는 약간 달라 보였다. 가벼움과 음모론이 주 무기라는 건 동일했지만, 도구가 글에서 말로 바뀌면서 파괴력은 배가됐다. 여과 장치 없는 말이라는 도구의 특성상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우도 늘어났고 정파성도 한층 강해졌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개인 매체인 팟캐스트는 수인한도(受忍限度)가 컸다.

그러다가 혁명이 일어났다. 총수는 일순간 공중파의 주요 자리를 꿰찼다.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가 공공재이며 세금의 산물인 공중파에서도 전매 특허인 가벼움과 음모론, 그리고 한층 강해진 정파성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총수는 부자가 됐다. 자칭 타칭 언론인 중 총수보다 많은 보수를 받았다는 이는 본 적이 없다. “사상과 돈벌이가 불분명하게 연결됐다. 사나운 혁명가 중 많은 사람이 공화국에 공헌한 그만큼 난폭하게 돈을 챙기기 시작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프랑스 혁명의 주역들을 비꼬면서 내뱉은 이 말이 낯설지 않은 상황이다.

총수는 자리를 내놓으라는 노골적 압박에 직면해있다. 방송국의 편성·보도·제작의 자유를 침해할 순 없지만, 왠지 총수에게 딴지를 걸고 싶다. 이제 맞지 않는 옷은 벗어버리고 보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낄낄거리며 특유의 가벼움을 마음껏 과시하면 어떨까. 20여 년 전 그때를 그리워하는 이가 기자만은 아닐 것이다.

박진석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