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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유비 혈투처럼…보수야당 초유의 중원 쟁탈전, 키맨은 尹

중앙일보

입력

조조와 유비가 한중(漢中)에서 크게 맞붙는 장면은 『삼국지연의』 명장면 중에서도 백미로 꼽힌다. 한중을 틀어막아 유비를 서촉에 가두려던 조조, 한중을 교두보로 중원을 겨누려던 유비로선 피할 수 없는 한 판 승부였다. 두 세력은 오랜 기간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유비의 사후엔 유지를 계승한 제갈량이 출사표까지 올리며 끊임없이 중원을 도모했다.

①야권 내 중원 싸움 누가 나서나

최근 한국 정치판에서도 중원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한창이다. 중원, 그러니까 정치 영역에서 중도의 영역이 결정적 공간이란 점은 연의와 꼭 닮았다. 선거 때마다 연전연패한 국민의힘이 4ㆍ7 재보궐선거에서 압승한 배경엔 중도층 표심을 야권이 가져갔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실제 과거보다 중도와 개혁을 지향하는 이들이 야권에 많다. 왕이 되려는 자이든, 왕을 만들려는 자이든 중도ㆍ개혁 세력의 대표 주자를 자임하고 유권자들에게 어필하려 든다. 그런데 막상 누가 가장 신망이 높고 유력한지에 대해선 뾰족한 답을 내기 어렵다. 상황이 이럴진대, 대선까지는 남은 시간은 10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중원을 차지하려는 야권 유력 정치인들 간의 합종연횡이 횡행하고, 더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왼쪽)과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3월 8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공군호텔에서 열린 제113주년 3·8 세계 여성의 날 기념식에 나란히 참석한 모습. 오종택 기자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왼쪽)과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3월 8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공군호텔에서 열린 제113주년 3·8 세계 여성의 날 기념식에 나란히 참석한 모습. 오종택 기자

하루가 멀다고 독설과 감언이 부딪친다. 누군가를 향해 "뇌물 전과자"라고 모독한 바로 그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해선 "흡인력이 강하다"고 추켜세운다. 무시할 수 없는 지지세를 거느린, 한 당의 대표를 향해 "건방지다.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엉망 된다"고 맹비난한 바로 그 사람은 또 다른 중량급 정치인들과는 식사를 함께 하며 연합설을 내비치기도 한다. 김종인·김병준·안철수·금태섭 등 범야권 정치인들 사이에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게 대선을 10개월여 앞둔 현재의 야권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야권에서 중도·개혁 성향의 정치 포지션을 구축했다는 것, 또 다가올 대선에서 주연이나 조연 혹은 킹메이커의 역할을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강성 지지층에 갇힌 여당의 외연 확장이 더딘 사이, 중도·개혁 성향의 야권 인사들이 일종의 영역 다툼, 즉 ‘중원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는 게 이들을 보는 정치권의 시각이다.

이같은 중원 쟁탈전에 대해 전문가들은 “대선 주자의 윤곽이 드러날 연말까진 다툼이 격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서로가 이른바 ‘프레너미(friend+enemy, 친구이자 적) 관계로 합종연횡을 거듭하면서 중원 장악을 시도할 것”이라며 “민주당이 놓친 중도층을 잡는 순간 대선까지 손에 쥘 수 있는 구도란 걸 고려하면 일종의 대선 전초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중원 둘러싼 야권 합종연횡.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중원 둘러싼 야권 합종연횡.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실제 서울시장 보궐선거 내내 고조됐던 김종인 전 위원장과 안철수 대표 간 갈등의 근저에는 ‘중도 실용’이란 동일 노선을 걷는 두 사람의 견제 심리가 깔려있다는 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견원지간’에까지 비유되는 김종인 전 위원장과 김병준 전 위원장도 개혁보수 성향으로 여야를 넘나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면에 처음부터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인사들도 적지 않다. 친분이 돈독한 것으로 알려진 김종인 전 위원장과 금태섭 전 의원이 대표적이다. 지난 16일 조찬 회동을 놓고 두 사람은 “사적인 만남”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정치권에선 금 전 의원이 시도하는 신당 창당에 김 전 위원장이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할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김 전 위원장과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도 중도 노선을 매개로 언제든 화학적 결합을 할 수 있는 관계로 분류된다.

오세훈 국민의힘 서울시장(오른쪽)와 안철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세빛둥둥섬 앞에서 서울시장 보궐선거 유세에 나선 모습. 오종택 기자

오세훈 국민의힘 서울시장(오른쪽)와 안철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세빛둥둥섬 앞에서 서울시장 보궐선거 유세에 나선 모습. 오종택 기자

정치적 상황에 따라 널 뛰는 관계도 있다. 안 대표와 오세훈 서울시장은 보궐선거에서 단일화로 손을 맞잡았지만, 이제는 야권 주도권을 놓고 맞붙는 잠재적인 경쟁자에 가깝다. 대선 도전을 공식화한 유승민 전 의원과 원희룡 제주지사는 넓게 보면 내부 경쟁자이지만, “지지율면에서 고전하는 두 사람이 향후 협력적인 경쟁 관계로 활로를 모색할 것”(국민의힘 3선 의원)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2012년 대선 당시 대선 후보와 조력자로 한솥밥을 먹던 안 대표와 금 전 의원은 이제 중원 공략을 놓고 맞붙는 사이가 됐다.

한때 삐걱거렸지만 대선 국면에서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재정립할 것으로 예상되는 인사들도 있다. 2018년 바른미래당 합당 이후 사이가 소원해진 유 전 의원과 안 대표인데, 김형준 명지대 정치학과 교수는 “대선 상황에 따라 원팀이 될 가능성도 있다”며 “특히 두 사람이 경제 등 분야에서 이슈 연대(issue cooperation) 방식으로 손을 잡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전망했다.

대선 도전을 공식화한 원희룡 제주지사(왼쪽)와 유승민 전 의원. 사진은 2017년 1월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개혁보수신당 중앙당 창당발기인대회에 참석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 중앙포토

대선 도전을 공식화한 원희룡 제주지사(왼쪽)와 유승민 전 의원. 사진은 2017년 1월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개혁보수신당 중앙당 창당발기인대회에 참석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 중앙포토

유력 대선주자로 떠오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변수로 더할 경우 이들 간의 관계 함수는 더 복잡해진다. 김종인 전 위원장과 금태섭 전 의원은 제1야당 외곽에서 윤 전 총장에게 손길을 내밀고 있다. 서울시장 선거 당시엔 윤 전 총장에게 러브콜을 보내던 오 시장과 안 대표는 대선 국면에선 협력도 경쟁도 가능한 긴장 관계로 바뀌는 중이다. 대선 도전을 공식화한 유 전 의원과 원 지사는 경제, 외교 등 이슈에서 윤 전 총장과 차별화를 시도하며 존재감 부각을 벼르고 있다.

정치컨설팅 ‘민’의 박성민 대표는 이들 야권 대선 주자를 두 그룹으로 분류했다. 박 대표는 “윤 전 총장과 안 대표는 ‘보수가 지지할 수 있는 중도 정치인’이고 원 지사와 유 전 의원은 ‘중도가 지지할 수 있는 보수 정치인’”이라며 “중원 싸움이 벌어지면 두 그룹에서 한 명의 승자가 나온 뒤, 막판에 일대일 승부를 펼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지난 2017년 3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박 전 대통령을 기다리는 자유한국당 친박계 인사들과 전직 청와대 비서실장들. 친박계는 2012년 대선 이후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사태 전까지 국내 보수 정치의 주류를 형성했다. 중앙포토

지난 2017년 3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박 전 대통령을 기다리는 자유한국당 친박계 인사들과 전직 청와대 비서실장들. 친박계는 2012년 대선 이후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사태 전까지 국내 보수 정치의 주류를 형성했다. 중앙포토

그간 국내 보수 야권에서 이들 ‘중원 정치인’은 일종의 회색 지대거나 비주류 신세에 가까웠다. 2012년 대선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친박계가 보수 정당의 주도권을 한동안 장악했다. 또 탄핵 이후에는 대선 후보 홍준표, 대선 패배 뒤엔 황교안 당 대표 체제를 거치며 보수 색채가 강한 이들이 주류를 형성했다. 국민의힘 3선 의원은 “보수 정당 역사에서 중도·개혁 성향 인사들이 서로 힘겨루기하는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야권 정치인들의 중원 싸움이 부각되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중도 전장이 무주공산인 데다가, 야권 내부에 대선 정국을 주도할 만한 강력한 원톱 주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정권 교체 여론이 상당하지만, 그 여론을 등에 업을 야권 인사가 부각되지 않는 게 내부 충돌의 원인”이라며 “향후 여당과의 진영 대결이라는 본 게임을 앞두고 야권 내 힘겨루기가 상당 기간 지속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의 합종연횡이 야권 정계 개편에 영향을 주는 걸 넘어서 대선 판도를 좌우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상당하다. 신율 명지대 정치학과 교수는 "야권 중원 싸움에서 승리하면 주인 없는 중도 전장을 손에 쥐는 셈”이라며 “코로나 백신과 부동산 사태 등 각종 변수를 고려해야 겠지만, 윤 전 총장과 야권 인사들이 결합하면 대선에서 무시할 수 없는 폭발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원 싸움 키포인트는 ‘尹 쟁탈전’
"정치인 윤석열" 실체는 아직 오리무중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을 수사하는 박영수 특검의 윤석열 수사팀장이 20일 오전 서울 강남구 특검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을 수사하는 박영수 특검의 윤석열 수사팀장이 20일 오전 서울 강남구 특검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정치권에선 중원 싸움의 키 맨(key man)으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꼽는 이들이 많다. 관계도에서 나타나듯, 중원의 실력자들 중 다수는 직·간접적으로 윤 전 총장에게 “함께 하자”며 손을 내민다. 여기엔 이른바 ‘살아있는 권력’에 거침없이 칼을 든 윤 전 총장의 이력이 있다. 박근혜 정부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며 각을 세우더니, 문재인 정부에서도 친문 핵심 인사인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해 전방위적 수사를 했다. 이런 모습으로 인해 중도층에게 소구력이 큰 공정ㆍ원칙ㆍ법치주의 이미지가 강하게 형성됐다는 게 정치권의 평가다.

문 대통령에 등돌린 중도 표심이 윤 전 총장에게 향하고 있다는 이른바 ‘윤석열 현상’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지난 19일 여론조사 업체 리얼미터가 JTBC 의뢰로 실시해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신의 정치성향을 중도라고 응답한 이들 가운데 43.6%가 대선 후보로 윤 전 총장을 지지한다고 밝혔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경쟁자들 사이에서 “야권 지지자들의 정권 교체 열망을 담은 거대한 저수지(안철수 대표)”란 평가를 받는 이유다.

이런 윤 전 총장에 대한 야권 핵심인사들의 태도는 미묘하게 엇갈린다. “대통령감인지 만나보고 도울지 판단하겠다”며 기대를 비친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은 사실상 국민의힘과의 ‘윤석열 쟁탈전’을 시작했다. “윤 전 총장이 전과자(김종인 전 위원장을 지칭)와 손을 잡겠느냐(김병준 전 비대위원장)”, “윤 전 총장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되면 ‘윤석열을 위한, 윤석열에 의한, 윤석열의 정당’이 될 것(장제원 의원)” 등의 발언에서 보듯 국민의힘에서도 윤 전 총장을 잡아당기려 한다.

동시에 경쟁자들에선 견제심리도 감지된다. “범야권 대통합을 해야 정권교체를 할 수 있다(안철수 대표)”, “정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원희룡 제주지사)” 같은 발언들로, 기존 정당에 들어와 경쟁하자는 게 이들이 공유하는 기본 인식이다.

다만 ‘정치인 윤석열’의 정치적 지향점은 오리무중이다. 진보·보수 등 노선을 명확히 밝힌 적이 없는 데다 최근 언론 등을 통해 낸 메시지도 “공정, 정의” 등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반론에 한정돼 있다. “정치인으로서는 아직 평가할 게 없다(유승민 전 의원)”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윤 전 총장은 비상장 우량주지만 상장 후엔 어떤 평가를 받을지 알 수 없다. 경제·외교안보 등 본인 전공분야가 아닌 데서 평가가 갈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손국희·성지원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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