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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받고 출·퇴근 보고했는데 사업자냐” 타이어뱅크 소송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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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광주 서구 타이어뱅크 상무점에 대해 '고의 휠 파손' 의혹으로 경찰이 압수수색을 한다는 소식에 취재진이 몰려와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광주 서구 타이어뱅크 상무점에 대해 '고의 휠 파손' 의혹으로 경찰이 압수수색을 한다는 소식에 취재진이 몰려와 있다. 연합뉴스

타이어뱅크 퇴직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퇴직금과 연차수당 등을 합쳐 수억 원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냈다. 박모(50)씨 등 2명이 지난 2월 서울남부지법에 각각 3억 4000여만원과 3억 9000여만원의 퇴직금이 지급되지 않았다며 소장을 제출했다.

"월급만 받았으니 근로자" 7억원대 소송

23일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타이어 유통 전문업체 타이어뱅크는 전국 450여개 대리점의 점주가 개인사업자로 등록돼 있다. 근로기준법상 개인사업자는 퇴직금 지급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박씨 등 타이어뱅크에서 10여년간 근무한 전 점주들은 “회사 요구에 따라 사업자등록을 하긴 했지만 사실상 지시를 받는 근로자였다”고 주장한다.

2011년 타이어뱅크 직원으로 입사한 박씨는 2017년 서울의 한 지점을 맡으면서 개인사업자로 등록했다. 박씨는 오전 8시에 출근 보고를 했고, 오후 8시 보고한 뒤에 퇴근이 가능했다. 월 5일로 제한된 휴무를 위해서도 사전에 허락을 맡아야만 했다. 박씨는 “주말에도 못 쉬고 한 달에 5일 쉴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지점 매출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못 쉴 때가 많았다”고 했다.

박씨는 매달 320만원의 고정급여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지점마다 할당된 매출을 초과 달성하면 내 돈이 되는 게 아니라 적립금으로 쌓였다”며 “적립금이 6000만원 이상 쌓인 적이 있지만, 그 돈을 받은 적은 없다”고 했다.

2009년부터 지난해 10월까지 타이어뱅크에서 일한 강모(34)씨는 지점만 30여곳을 옮겨 다니며 일했다. 강씨는 “2017년 5월에 사업자등록을 내고 점장으로 근무하게 됐지만, 매출이 적다는 이유로 8개월 만에 다시 일반 직원으로 돌아가야 했다”며 “서울, 경기뿐 아니라 강원도와 충청도까지 회사 지시에 따라 옮겨 다녔다”고 말했다. 이어 “점주일 때는 사업자라고, 직원일 때는 1년 이상 한 곳에 있던 적이 없다는 이유로 퇴직금을 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 덧붙였다.

형사재판 1심은 "근로자 아니다"

이에 대해 타이어뱅크 측은 “전국 지점은 본사와 위탁 관계에 있어 퇴직금 등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며 “관련 사건에 대해 앞서 법원이 근로자성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대전지방법원·대전고등법원 전경. 중앙포토

대전지방법원·대전고등법원 전경. 중앙포토

대전지검은 2019년 근로자 10명의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은 혐의(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위반)로 타이어뱅크 김정규 회장을 기소했다. 당시 검찰은 “본사가 점주를 채용하고 근무 시간을 관리하면서 급여와 수당을 준 점 등으로 볼 때 본사와 점주는 사용자와 근로자”라고 했지만 1심은 해당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항소하면서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위탁 업체인 지점들이 일정한 시간에 문을 여닫아야 해서 개점과 폐업 보고를 받았고, 숙련된 인력이 한 번에 쉬는 것을 막기 위해 휴무일을 관리했다는 게 본사 측 입장이다. 앞서 재판부는 “도급계약에서도 일정 수준의 지휘관계는 인정되고, 근로소득보다 사업소득의 성격이 강하다”는 취지로 근로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민사소송은 달라질까…노동계 주목 

개인사업자의 근로자성 여부는 노동계의 최대 이슈다. 지난해 보험업계에서는 정규직 지점장을 개인사업자로 등록한 뒤 지점운영권을 부여하는 ‘사업가형 지점장’의 근로자 지위를 인정해달라는 설계사 노조와 보험사 간 갈등이 벌어졌다. 지난 2월엔 법원이 코웨이 임대정수기의 설치 수리기사에 대해 개인사업자가 아닌 정규직 근로자로 보고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지난해 6월 민주노총서비스연맹 방과후강사노조 조합원들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대교에듀캠프 강사 퇴직금소송 판결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법원 3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개인사업자로 등록됐더라도 위탁업체 소속으로 업무 감독을 받았다면 근로자성이 있어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뉴스1

지난해 6월 민주노총서비스연맹 방과후강사노조 조합원들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대교에듀캠프 강사 퇴직금소송 판결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법원 3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개인사업자로 등록됐더라도 위탁업체 소속으로 업무 감독을 받았다면 근로자성이 있어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뉴스1

이에 대해 노동분야 전문가인 김기덕 변호사(법률사무소 새날)는 “사용자가 법적인 책임을 피하기 위해 도입된 근로 형태"라며 "택배기사, 학습지 교사 등 유사한 소송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사건을 주로 맡는 검찰 출신 변호사는 “형사와 민사소송은 별개의 문제”라며 “지시 관계가 명확하다면 근로자성이 인정된다는 게 최근 판례의 경향”이라고 설명했다. 박씨와 강씨가 제기한 민사소송의 첫 재판은 서울남부지법에서 다음 달 7일 열릴 예정이다.

정진호 기자 jeong.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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