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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사는 데 지쳤는가…눈 딱 감고 남도 2박3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강정영의 이웃집 부자이야기(75)

송강 정철은 권력의 정점에 섰던 관료이자 빼어난 문객이었다. 아버지가 귀양살이 끝에 담양으로 이주할 때 따라가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년을 보낸다. 그는 출중한 인재로 26살에 장원급제한다. 그런 그가 당쟁으로 유배와 복직을 반복하다가 56세 때 진주로 유배되는 날 둘째 딸이 사망한다. 이 단장의 슬픔을 “길가 돌부처는 헐벗고 마주 서서, 비바람 눈 서리를 실컷 맞을망정 인간의 이별을 모르니 그를 부러워하노라”고 적었다.

송강은 산수 강호와 사대부의 호방한 정신세계를 보여준 한시 564수를 남겼다. 당파 싸움에서 공격당할 때마다 율곡이 바람막이 역할을 해 그와 인연이 각별했다. 유배지에서 그를 그리며 쓴 시가 있다.

“열흘 넘어 병들어 강 마을에 누웠는데, 창공의 맑은 서리 온갖 나무 이울었네.
가을 달 멀리 비쳐 강물은 더욱 희고, 저믄 구름 높이 떠 옥봉이 외롭구나.
옛일이 그리워 눈물이 자주 난다.
우리 님 그리워 난간에 기대서니
낙하고목 예나 이제 다르지 않은데, 이 마음 유달리 스산하구나.”

순천 선암사의 빼어난 자연미와 홍매는 찾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사로잡는다. 그 정원은 신선이 노닐던 몽환적 몽유도원이다. [사진 pixabay]

순천 선암사의 빼어난 자연미와 홍매는 찾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사로잡는다. 그 정원은 신선이 노닐던 몽환적 몽유도원이다. [사진 pixabay]

남도는 유배당한 선비의 귀양살이 흔적과 그 절절한 사연이 많다. 고산 윤선도, 정약용, 강항, 기대승, 정여립, 매천 황현 등이 고독한 유배 생활을 시서화로 마음을 달랬다.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죄였다. 그들의 생각이 옳았으나, 세상은 그 뜻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로 인해 유배 끝에 죽임을 당한 선비가 수천 명에 이른다.

먼저 순천 선암사로 가보자. 그곳은 무엇보다 빼어난 자연미와 홍매로 찾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사로잡는다. 그 정원은 신선이 노닐던 몽환적 몽유도원이다. 한국 3대 홍매로는 강릉 오죽헌, 장성 백양사, 그리고 선암사 홍매를 꼽는데, 그중 으뜸이 선암사 것이다. 고즈넉한 가람의 배열에 홍매, 벚꽃, 등 굽은 소나무, 차밭, 은행나무, 소나무길 등 가히 남도 최고라 해도 모자란다. 대부분의 명승지 절 입구에는 음식점, 주점, 기념품 가게가 너절하게 늘어서 정숙한 절 맛을 해친다. 이와 달리 선암사 가는 길은 자연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지즐대는 개울 물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번잡한 마음이 차분해진다. 선암사는 중생의 상처받고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곳이다.

“눈물이 나거든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중략)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 정호승 시-

해남 두륜산 자락 대흥사의 자연과 문화유산도 출중하다. 오솔길 따라 흐르는 개울물, 아담한 연못, 가람의 넉넉한 배치와 사이사이 고목의 휘어짐, 초봄의 흐드러진 동백, 추사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 편액 등, 어느 하나 빼놓을 것 없이 정갈하고 간결하다.

섬진강 하구는 남도의 백미다. 매화마을, 십리 벚꽃길, 하동 쌍계사·최참판 댁·박경리 문학관, 영호남이 만나는 화개마을, 거기서 좀 더 북쪽에 구례 화엄사와 산수유 마을이 있다. 섬진강을 두고 좌우로 배치된 자연과 문화유산은 그냥 그림이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며, 개울물들이 끊이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저 무는 동네 강변에는 토끼풀 자운영이 머리를 이어주며 꽃등도 달아준다’고 노래했다. 또 ‘오늘도 강을 건너 비탈진 산길 빈 지게를 지고 해 저문 강길을 어둑어둑 홀로 돌아오시며, 마른 풀잎보다 더 가볍게 흔들리며 징검다리에서 봄바람 타시는 어머니’를 추억하였다.

4월은 무르익는 봄이고, 봄은 남도가 제격이다. 섬진강 굽이굽이 휘돌아 유유히 흐르고, 강 따라 매화 벚꽃이 만개하고 산자락 산수유가 반긴다. [사진 pixabay]

4월은 무르익는 봄이고, 봄은 남도가 제격이다. 섬진강 굽이굽이 휘돌아 유유히 흐르고, 강 따라 매화 벚꽃이 만개하고 산자락 산수유가 반긴다. [사진 pixabay]

한려수도를 품고 있는 통영, 여수는 또 어떤가. 사량도, 한산도, 매물도, 소매물도, 욕지도, 비진도, 연대도 등 비경을 간직한 아름다운 보석이다. 여객선 터미널 부근 음식점에서 푸짐한 생선구이로 아침 식사를 한 후 페리를 타고 이들을 탐방해 보자. 영화의 한 장면주인공이 따로 없다. 진주 남강의 촉석루에는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르고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논개의 마음이 흐른다. 남도 가는 길에 꼭 한번 들러보자. 청도 운문사의 솔 냄새 가득한 솔밭길, 양산 통도사 경내의 14개 암자는 각각 특색이 있고 기품이 있다. 그곳 암자 순례는 고급스러운 힐링 코스이다. 그중 압권이 지장암이다. 저절로 마음이 정화되고 경건해진다.

4월은 무르익는 봄이고, 봄은 남도가 제격이다. 섬진강 굽이굽이 휘돌아 유유히 흐르고, 강 따라 매화 벚꽃이 만개하고 산자락 산수유가 반긴다. 엄동설한 이겨내고 꽃이 피는 건 힘이 들지만 지는 건 잠깐이다. 사는 데 지치고 눈 돌릴 틈도 없이 바빴는가. 눈 딱 감고, 하던 일 밀쳐두고 이삼일 남도로 떠나자. 평일이 좋다. 4월 섬진강 일대는 주말에 인파가 몰린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 그때 그 봄 처녀가 달려 나와 맞아줄 것이다.

청강투자자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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