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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 달력, 거꾸로 지도…“남이 안하는 것 해야 일류 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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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호 02면

[SUNDAY 인터뷰] 이광형 KAIST 신임 총장

‘괴짜 총장’ 이광형 KAIST 총장이 ‘10년 후 미래를 생각하며 살자’는 취지로 만든 2031년 달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총장 오른쪽 뒤에 ‘거꾸로 세계지도’가 걸려 있다. 김성태 객원기자

‘괴짜 총장’ 이광형 KAIST 총장이 ‘10년 후 미래를 생각하며 살자’는 취지로 만든 2031년 달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총장 오른쪽 뒤에 ‘거꾸로 세계지도’가 걸려 있다. 김성태 객원기자

‘괴짜 총장’의 집무실은 역시 남달랐다. ‘4월 8일 화요일’. 책상에 올려진 4월 달력의 날짜와 요일이 맞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앞으로 10년 후, 2031년 달력이다. 그는 평소 연구실의 TV를 거꾸로 걸어두고 있어 ‘괴짜 교수’로 불려왔다. 1999년 방영한 인기 TV 드라마 ‘카이스트(KAIST)’에서 ‘괴짜 교수’로 불렸던 박기훈(안정훈 분) KAIST 전산학과 교수의 실존 모델이다. 총장실을 더 둘러보니 이상한 건 달력뿐 아니었다. 세계지도도, 조직도도 거꾸로 걸려있다. 중앙일보가 지난 2월 말 취임한 이광형(67) KAIST 신임 총장을 8일 오후 만났다. 취임 두 달이 채 못 된 이 총장의 아래·윗입술이 부르터있었다.

학생들 대기업 지향은 2류 의식 #한국 대학 획일화 돼 다양성 부족 #남 좇는 최고보다 최초 연구 중요 #성공률 80% 넘으면 지원 안 해 #특허 없으면 사업할 수 없는 시대 #한국 ‘동북아 허브국’ 만들어야

실리콘밸리 다녀온 김정주, 넥슨 창업

이광형 KAIST 총장이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성태 객원기자

이광형 KAIST 총장이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성태 객원기자

10년 후 달력에 거꾸로 세계지도, 거꾸로 조직도 …, 좀 당황스럽다.
“‘10년 후 미래를 생각하며 살자’는 취지에서 만들었다. 일부러 소문낸 것도 아닌데 2031년 달력 반응이 좋다. 300부를 만들었는데, 달라는 곳이 많아 300부를 더 주문했다. 거꾸로 세계지도는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이 만들어 쓰고 계신 걸 나눠주신 거다. 세계지도를 뒤집어 보면 한반도는 대륙에서 대양으로 뻗어 나가는 최적의 항구 모양, 위쪽 일본 열도는 방파제 격이다. 거꾸로 조직도엔 총장이 맨 아래에 있다. 교직원을 섬기는 마음으로 살겠다는 내 다짐이다.”
KAIST 개교 50주년에 총장이 되셨다. 지난 50년을 돌아보면.
“KAIST는 과학기술을 통한 경제발전이라는 정부의 목표 아래 국내 최초의 연구중심 이공계 특수대학원으로 1971년 설립됐다.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사회·경제·교육 환경이 열악해 수많은 인재가 해외 유학을 떠났고,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환경에서 출범한 KAIST가 국민의 전폭적 지지와 성원 덕분에 50년 만에 QS대학평가에서 세계 39위에 오르는 세계적 수준의 대학이 됐다. 다만 지금 대한민국의 국가 위상이 세계 12위고, 세계 10위권 기업과 음악·영화 등에서도 세계 수위권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대학은 그러질 못하고 있다.”
총장실 벽면에 걸려 있는 거꾸로 세계지도(왼쪽)와 거꾸로 조직도. 김성태 객원기자

총장실 벽면에 걸려 있는 거꾸로 세계지도(왼쪽)와 거꾸로 조직도. 김성태 객원기자

한국 대학 교육의 문제점은 뭔가.
“한국 대학은 획일화돼 다양성이 부족하다. 대학마다 독특한 특성을 가질 수 있도록 자율성을 줘야 하는데, 정부에서 대학을 평가하는 잣대가 너무 획일적이다. 교수도 성공하기 쉬운 연구만 한다.”
KAIST의 향후 비전은 뭔가.
“국가 위상에 맞는 세계 일류대학이다. 기존의 따라 하기 성장전략으로는 2등까지는 할 수 있지만, 1등은 못한다. 1등을 하려면 남이 못하는 것, 안 하는 것을 해야 한다. 그래서 향후 미래 50년을 위한 신문화 비전으로 ‘QAIST’를 제안했다. 질문하는 창의인재와 인공지능(AI) 시대 이후의 연구, 캠퍼스의 글로벌화, 기술사업화를 통한 재정자립, 신뢰 인재양성이 그것이다.”〈표 참조〉
이광형 총장이 인터뷰에 앞서 KAIST 교정 조형물 앞에 섰다. 김성태 객원기자

이광형 총장이 인터뷰에 앞서 KAIST 교정 조형물 앞에 섰다. 김성태 객원기자

세계 일류대학을 육성하기 위한 총장의 역할은 무엇인가.
“세계 일류대학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KAIST 구성원의 의식을 바꾸는 역할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KAIST가 세계 50위 안팎에 머무른 이유는 세계 일류대학이 되겠다는 다짐을 안 해서다. 삼성은 세계 일류 기업이 됐고, 방탄소년단(BTS)은 빌보드차트 1위에 올랐다.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는 ‘당신이 배를 만들고 싶다면, 넓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줘라’고 말했다. KAIST도 구성원들이 일류가 되겠다는 꿈을 꾸고 결의를 다진다면 일류가 될 수 있다.”
교내 1개의 연구소(랩)가 1개의 벤처기업을 육성하자고 제안하는 등 창업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다.
“20세기형 대학은 교육과 연구가 주된 임무였다. 하지만 21세기형 대학은 교육·연구와 더불어 이를 사업화하는 임무가 추가된다. 기술사업화는 연구자에게 보람과 명예, 재산을 주고, 대학엔 재정 자립화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임기 중 부작용이 날 정도로 적극 벤처 창업을 지원할 생각이다. 청년 실업이 국가적 문제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 창업이다. 경제 영토를 넓히려면 창업이 가장 좋은 수단이다.”
교내 호수에서 이광형 총장이 캠퍼스 내 연못에 사는 거위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이 총장은 '거위 아빠'로도 유명하다. 20여년 전 인근 유성시장에서 직접 사와 지금껏 길렀다. 김성태 객원기자

교내 호수에서 이광형 총장이 캠퍼스 내 연못에 사는 거위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이 총장은 '거위 아빠'로도 유명하다. 20여년 전 인근 유성시장에서 직접 사와 지금껏 길렀다. 김성태 객원기자

취임식 때 밝힌 ‘기술이전전담조직(TLO·Technology Licensing Office) 민영화’도 창업 활성화를 위한 방법인가.
“그렇다. KAIST가 보유한 특허와 지식재산이 상당한데, 이를 잘 활용하면 새로운 사업을 창출할 수 있다. 기존의 경직적인 조직문화를 탈피하려면 민간 기업이 이를 담당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기업가정신을 바탕으로 학생과 연구 인력이 보유한 지식재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이들이 창업할 수 있는 기술을 발굴하기 위해서 올해 안에 스핀오프(spin off) 방식으로 TLO를 민영화하겠다.”
제자들이 삼성·구글과 같은 일류기업에 가지 않고 창업하겠다고 하면 학교로서는 조금 주저할 수 있지 않나.
“왜인가. 나는 학생들이 대기업을 지향하는 건 2류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일류가 아니다. 스스로 생각해서 자기가 잘났고 똑똑하다면 자기 인생을 자기 스스로 정한 목표를 향해서 투신하는 게 보람 있는 것 아닌가. KAIST 졸업생이 세계 일류기업에 취직하는 것보다 창업하는 것을 원한다. 그게 본인을 위하고 인류를 위한 길이다.”
‘성공 가능성이 80% 이상으로 높은 연구에는 연구비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파격 발언도 하셨다.
“정부 연구·개발(R&D) 과제 성공률이 90%가 넘는다고 하지 않나. 목표를 달성하기 쉬운, 연구를 위한 연구가 문제다. 이제는 ‘따라가는’ 연구가 아닌 무엇을 연구할까를 생각해야 할 때다. ‘최고’보다 ‘최초’의 연구를 통해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도록 돕겠다는 취지다.”

미래 내다보고 준비해야 대처 가능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한때 미국 실리콘밸리로 제자들을 연수보냈다는 얘기가 흥미롭다.
“1998년 IMF 외환위기 직전까지 90년대 중반까지 6개월씩. 매년 4명을 보냈다. 학생들에게 우물 밖 세상을 보여주자는 취지였다. 처음엔 좀 걱정했는데 다들 스스로 알아서 잘했다. 그때 ‘우리 학생들은 능력이 무한하구나. 간섭할 필요 없이 세상을 보여주고 꿈을 갖게 하면 되는구나’하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수조원의 기업을 이끄는 넥슨 김정주와 아이디스 김영달도 그때 실리콘밸리를 다녀온 제자다.”
국회 세계특허허브추진위원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지식재산은 국부의 원천이다. SK이노베이션과 LG에너지솔루션의 특허 분쟁에서 보는 것처럼, 이제 특허가 없으면 사업을 할 수 없는 시대가 열렸다. 우리나라를 동아시아 특허의 중심 국가로 육성하자는 취지에서 공동대표를 맡았다. 특허는 속지주의다. 특허를 출원한 국가에서만 특허의 효력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분쟁이 생기면 해당 국가에서 소송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이때 특허권자 입장에서 전문 지식을 갖춘 판사가 빠르고 정확하게 판결을 내리는 국가에서 먼저 특허소송을 하는 게 일반적이다. 한 국가에서 판결을 내리면, 다른 국가도 이를 참조해 판결하기 때문이다. 미국 남부 텍사스 동부법원과 미국 서부 산호세법원, 독일의 만하임법원이 대표적이다.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이런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천국제공항도 30여 년 전에는 갯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동북아 허브공항으로 자리매김했다. 공항처럼 한국도 특허중심 국가가 될 수 있다.”
이광형 총장 집무실 원탁 테이블 가운데엔 조그만 어린왕자 인형이 놓여있다. 이 총장은 어린왕자를 보면 어릴 적도 그랬지만, 지금도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 이유가 뭐냐는 기자의 물음에,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고 답했다. 김성태 객원기자

이광형 총장 집무실 원탁 테이블 가운데엔 조그만 어린왕자 인형이 놓여있다. 이 총장은 어린왕자를 보면 어릴 적도 그랬지만, 지금도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 이유가 뭐냐는 기자의 물음에,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고 답했다. 김성태 객원기자

과학기술 특성화대학인데 미래전략대학원도 만들었다. 왜 미래학인가.
“미래는 항상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고 불확실하지만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이다. 그래서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시점에 더 필요한 건 기술의 발전으로 사회가 급변하는데 1년 후도 내다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미래 연구의 기본은 발생 가능한 여러 가지 미래를 미리 내다보고 대비하는 거다. 이렇게 하면 어떤 미래가 닥쳐도 당황하지 않고 맞이할 수 있다. 또 발생 가능한 미래 중에서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미래를 만들어 갈 수도 있다. 그래서 미래학이 필요한 것이다. 10년 후 달력을 만든 이유기도 하다.”
거액 기부가 이어지고 있다. 유독 KAIST에 거금을 기부하는 이유가 뭘까
“그분들은 국가의 발전을 위해 돈을 쓰고 싶어 한다. 더불어 과학기술 발전이 국가 발전이며, KAIST가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의 선봉장이라고 생각한다. 그간 돈을 주면 제대로 쓴다는 믿음이 쌓여온 영향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광형 총장은

● 1954년 전북 정읍생
● 서울대 산업공학 학사
● KAIST 산업공학 석사
● 프랑스 국립응용과학원(INSA) 컴퓨터 석·박사
● 프랑스 리옹제1대학 전산학 박사
● KAIST 교수(1985~ )
●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대 원장
● KAIST 17대 총장(2021.3~ )
● 프랑스정부 훈장(Chevalier) 수상(2003)
●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2016)
● 대한민국 녹조근정훈장(2020)

대전=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 문희철 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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