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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보잡’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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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사회2팀장

김승현 사회2팀장

아마도 대다수 서울시민은 그들을 들러리 또는 ‘듣보잡’으로 여길 것이다.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12명의 후보 중 2명을 제외한 10명 말이다. ‘객기(客氣)’라며 비웃거나 아예 관심 밖일지도 모른다.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이 많다”는 최고령 허경영 후보(74·기호 7번) 정도가 낯익을 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것’들의 ‘설’을 왜 들어야 하겠는가.

‘강남 해체’ ‘여자 혼자도 잘 살게’ #3040 후보들의 객기같은 출사표 #새 서울시장 그 진정성 포용해야

본인들도 이런 사정을 모르진 않을 텐데, 도대체 왜, 객쩍은 혈기를 부리는 걸까. 그런 궁금증으로 3040 후보 6명을 인터뷰한 2030 후배 기자들은 예상보다 후한 취재 후기를 이야기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었다”면서다. 선거일이 지나면 무참히 잊힐 출사표이겠지만, 귀를 기울이니 곱씹어볼 만한 진정성이 느껴졌다는 얘기다.

이번이 5번째 출마라는 신지혜(34·기호 6번) 기본소득당 후보. 2014년 경기도의회 의원 출마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낙방에도 도전장을 낸 이유를 묻자 “기본소득과 페미니즘의 세상이 도래하지 않았으니까요”라고 즉답했다. “유통기한 지난 386 기득권 정치를 끝내고 새로운 서울을 디자인하고 싶다”는 신 후보는 ‘안 될 거 없잖아’라는 당찬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토목건축 예산 등을 줄여 서울시민에게 연간 80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할 돈을 마련하겠다는 신 후보의 공약은 치기 어린 몽상일까.

시민의 반감이 적지 않은 무지개 색깔 깃발을 단 따릉이를 타고 선거 운동을 하는 오태양(46·기호 8번) 미래당 후보는 시민들의 ‘차별감수성’이 변하기를 바랐다. 퀴어축제, 성 소수자 등에 대한 일반인의 불편한 시선을 알고 있다면서 “다만, 성숙한 시민이라면 1년에 한 번 열리는 축제를 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보다는 피해 주는 방법을 쓸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반문했다. 일반인의 ‘보지 않을 권리’가 성 소수자에겐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이 될 수 있다는 논리는 듣보잡의 궤변일까. 유세 현장에서 그는 “듣보잡 정당과 정치인들이 많아질 때 대한민국 정치의 혁명은 비로소 시작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소문 포럼 4/6

서소문 포럼 4/6

보라색 점프 수트의 김진아(46·기호 11번) 여성의당 후보의 외침은 기성 정치권의 뼈를 때린다. 광고회사 출신답게 ‘여자 혼자도 살기 좋은 서울’이란 핵심 슬로건으로 많은 화두를 던졌다. 이번 보궐선거의 원인이 된 사건에서 보듯이 한국에서 여성 혼자서,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하지 않고, 존중받으며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김 후보는 “여성들이 자신을 위해 투표하면 된다. 변화는 생각보다 쉽게 이뤄진다”고 호소했다. “서울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나에게 투표하면 당선된다”는 객기가 짠했다.

서울 강남 한복판 2호선 강남역에서 ‘강남 해체!’를 주장한 송명숙(34·기호 12번) 후보는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상징하는 서울 강남을 거부했다. “부동산 불로소득의 상징, 스카이캐슬로 대표되는 교육 불평등의 모델”이라면서다. 양도·증여·매매가 불가능한 공공임대주택을 무주택자에게 제공해 집을 권리로서 누리는 ‘집 사용권’이 핵심 공약이다. 용산 참사를 계기로 정치에 뛰어들었다는 이 청년 정치인의 도전은 신기루를 좇는 것처럼 무모한가.

자기가 쓴 글에서 촛불혁명이 시작됐다는 황당한 주장을 펴는 이도엽(37·기호 14번) 무소속 후보는 “촛불혁명을 완성하고자 출마했다”고 했다. 명함도 없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온라인 선거운동을 하는 그는 “명함 돌리고 유세차에서 소리 지르는 건 구시대적인 방식”이라고 믿는다. 0.1%에 불과한 여론조사 지지율에 실망하면서도 그의 신념은 확고했다. “자기 목소리를 내고 그렇게 해야 세상이 바뀌니 많은 사람이 시장에 출마했으면 좋겠다”는 그는 과연 들러리인가.

3년 전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에서 무소속으로 다시 나온 신지예(31·기호 15번) 후보는 “박영선·오세훈 후보는 절대 서울의 답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박원순 시장 성폭력 사건과 민주당을 심판하는 선거이지만, 그렇다고 정치의 시간을 10년 전으로 돌릴 수 없다”면서다. ‘당신의 자리가 있는 서울’을 만들겠다는 최연소 시장 후보의 당당함이 한국 정치의 미래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시구처럼 3040 후보들이 토해내는 사자후를 허투루 듣지 않았으면 한다. 누가 서울시장이 되더라도 그 뜨거운 객기를 함부로 발로 차지 않기를 소망한다.

김승현 사회2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