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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퇴임 후 행복할까"···'이 시대의 어른' 라종일에 물었다

중앙일보

입력

라종일 전 주일ㆍ주영대사가 지난달 23일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라종일 전 주일ㆍ주영대사가 지난달 23일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이 시대에 어른이 있느냐고 묻는 당신께 이렇게 답한다. 라종일이 있다.

올해 만 81세가 된 그는 이념을 뛰어넘고 분야를 넘나들며 활약해왔다. 학계에서 시작해 외교·안보 분야에서 영국과 일본 주재 대사부터 국가정보원 1차장 및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엔 그의 이름을 딴 ‘라종일 렉처(Ra Jong-yil Lecture)’가 있다.

저자로도 일가를 이뤘다. 국정원 재직 시절 경험을 생생히 녹여 아픈 과거사를 재조명한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 부터, 한때 북한의 2인자로 불렸던 장성택의 몰락을 예견했던 『장성택의 길』도 있다. 『장성택의 길』은 다음 달 일본어로도 번역 출간 예정이다. 중국에선 그의 동화 『비빔밥 이야기』도 인기가 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최근 『한국의 발견』이라는 신간으로 돌아왔다. 신세대 에세이스트인 김현진ㆍ현종희 씨와 공저했다.

지난달 말 중앙일보 중국연구회 100회 강연자로 초청된 그를 따로 만났다. 비공개 강연에서 그는 “중국은 현재 강국일지는 모르지만, 타국에 모범이 되는 대국은 되지 못한다”는 요지로 깊이 있는 지혜 보따리를 풀었다.

라종일 전 대사의 신간.

라종일 전 대사의 신간.

왜 지금 『한국의 발견』을 쓰셨나.  
“한국이 세계사의 중심 무대에 등장한 건 6ㆍ25와 1988년 서울올림픽 때다. 서양의 근대를 이룬 두 개의 개념, 즉 자유와 평등이 서로의 모순을 견디다 못해 한반도에서 충돌한 게 6ㆍ25다. 자유는 대서양 건너 미국으로 갔다가, 평등은 우랄산맥을 넘어 러시아로 갔다가 빙빙 돌아 한반도에서 만난 것이다. 그런 나라가 전쟁의 참화를 딛고 88올림픽을 일궈냈다. 오히려 우리가 잘 모르지만 88올림픽의 효과는 컸다. 북한ㆍ쿠바만 제외하고 모든 나라가 참여한 게 서울올림픽이었는데, 이는 시장경제가 통제경제에 거둔 승리를 상징하게 됐다.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비에트 연방) 대통령 측근에게 들은 말이다. ‘한국은 6ㆍ25 발발 이후 38년 만에 올림픽을 치렀는데 우린 그때 짓기 시작한 건물을 완공도 못 했다’고.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다. 이제 우리를 스스로 발견해야 할 때가 다시금 도래했다고 본다. 부제가 ‘한국인은 스스로를 어떻게 발견하고 있는가’로 붙인 까닭이다.”  
라종일 전 대사는 인터뷰 내내 유머를 잃지 않았다. 장진영 기자

라종일 전 대사는 인터뷰 내내 유머를 잃지 않았다. 장진영 기자

한국은 지금 세대별, 정치성향별, 성별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데.  
“역사를 먼저 살펴보자. 우리가 나름 정치를 시작한 역사는 길어야 사반세기 정도라고 봐야한다. 짧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비정상이라고 우려하지는 않는다. 급히 달려오다보니 미결로 남은 문제가 많다. 우리뿐 아니라 해외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유감스러운 것은 있다. 사회가 양분되는 것을 정치가 오히려 조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원인은 어떻게 진단하시는지.  
“정치인이 문제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식으로, 자기 편이 하면 옳고 남이 하면 틀렸다는 정치인들의 수준이 낮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강국에 둘러싸인 데다 북한이라는 존재도 있다. 우리가 분열되면 외국이 우리에 대해 갖는 영향력이 커지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관리를 해야 하는 게 정치인인데, 그래서 정치인이란 존경을 받아야 하는 직업인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정치인이 바뀌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시는지.  
“젊은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 우리는 왜 40대 대통령이 없나. 미국도 (존 F) 케네디가 나온 뒤 냉전 기류가 많이 바뀌었고, 지금도 프랑스엔 (에마뉘엘) 마크롱, 캐나다엔 (쥐스탱) 트뤼도 총리 등이 포진해있다. 물론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변화에 발을 맞추고 흐름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젊은 정신의 정치인이 절실하다.”
지난해 펴낸 책이 의미심장했다. 『한국의 불행한 대통령들』(공저)인데.  
“한국에 더 이상은 불행한 대통령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 사면을 해주는 게 옳다고는 보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론 참 안 됐다.”  
곤란할 질문일 수 있지만 여쭙겠다. 문재인 대통령은 퇴임 후 어떤 대통령으로 기억될까.  
“(웃으며) 영국 속담에 ‘곤란한 질문은 없다. 곤란한 답만이 있다’는 말이 있다. 곤란하지 않다. 답은 간단하니까. 아직 모른다. 문 대통령에겐 그래도 아직 1년이란 시간이 남아있다. 지지율도 30%대까지 떨어지긴 했지만 상당히 있는 편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바라건대 불행한 대통령으로 남지 않았으면 한다. 남은 1년이라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1년을 잘 활용하길 바란다.”  
모두가 장성택을 '북한 2인자'라 평가할 때, 라종일 전 대사는 그의 몰락을 예언했다. 사진은 북한이 노동신문에 게재한 2013년 재판 사진.

모두가 장성택을 '북한 2인자'라 평가할 때, 라종일 전 대사는 그의 몰락을 예언했다. 사진은 북한이 노동신문에 게재한 2013년 재판 사진.

스스로를 진보라고 보시나 보수라고 보시나.
“그런 질문 참 많이 받는다. 큰 의미 없는 질문이다. 어떤 면은 보수이지만 또 다른 면은 진보다. 사람을 그렇게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보면 이렇게 보이고 저렇게 보면 저렇게 보이는 게 세상사다.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살아보니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꼽아보신다면.  
“유머. 웃음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세상을 둘러보라. 얼마나 웃을 거리가 많은가.”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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