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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 인터뷰 | 데뷔 60년 외길인생 하춘화의 고집

중앙일보

입력

1961년 6세 때 가요계 입문… 올해 가수 나이 ‘환갑’ 맞아
2년 전 고향에 국내 유일 트로트 가요센터 열고 교육 힘써

‘영원한 디바’ 하춘화가 3월 8일 서울 중구 서소문로 중앙빌딩에서 진행된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세월을 회고하고 있다.

‘영원한 디바’ 하춘화가 3월 8일 서울 중구 서소문로 중앙빌딩에서 진행된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세월을 회고하고 있다.

"인생의 황금기는 60세부터 75세까지다. 75세부터 90세까지는 마음껏 달릴 나이다. 75세까지 성장하고 90세까지 달려라.” ‘102세 철학자’ 김형석(1920년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의 지론이다. 그는 3년 전 월간중앙과의 특별 인터뷰에서도 그렇게 강조했다. 김 명예교수의 말대로라면 1955년생인 하춘화는 지금 인생 황금기의 초입(初入)에 들어선 게 분명하다. 하춘화는 “김형석 교수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하고, 또 그 말씀을 가슴속에 새기며 산다”고 했다.

“열정 식으면 모든 게 끝, 남은 생은 후배 육성을 위해”

‘영원한 디바’ 하춘화가 올해로 데뷔 60주년을 맞았다. 강산이 여섯 번 바뀔 법한 시간이 흘렀지만 하춘화는 별로 변한 게 없다. 가수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은 물론이고 노래에 대한 열정도 변함이 없다. “열정이 식으면 모든 게 끝난다”는 게 하춘화의 오랜 소신이다.

2021년 창간 53년을 맞은 월간중앙이 3월 8일 서울 서소문로 중앙빌딩으로 하춘화를 초대했다. 하춘화는 “지금까지는 10년 단위로 데뷔 기념공연을 열었는데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공연이 어렵게 됐다”며 “그 대신 TV 출연 등 비대면 무대에 자주 올라 팬들과 만나려 한다”며 환하게 웃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60주년 기념공연은 취소됐지만 오랜 세월 저를 아껴주신 분들을 위해 TV 출연 등 비대면 공연은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공연 수익금의 일부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하려 해요. 대한적십자사와 함께 좋은 일을 하려고 계획 중입니다.”

하춘화는 자신의 데뷔 기념 앨범을 늘 2~3년 전에 발표해왔다. 60주년 기념 앨범도 앞서 2019년에 발표했다. 하춘화는 “마산에 있는 경남대를 나왔는데 마산과 진해가 창원시로 통합되면서 마산이란 이름이 잊히고 있다”고 타이틀곡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타이틀곡 ‘마산항엔 비가 내린다’는 노랫말은 하춘화가, 곡은 마산 출신인 이호섭이 만들었다. 앨범은 신곡 3곡에 기존 히트곡 12곡 그리고 MR(Music Recorded) 3곡으로 구성됐다.

데뷔 60주년,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아요.

“사실 실감이 잘 안 나요. 제가 데뷔하던 때만 해도 대중예술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너무 컸거든요. 더구나 아이가 어른 노래를 부른다는 그 자체만으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요. 하지만 아버지는 ‘자식은 부모의 의지나 욕심대로 키우는 게 아니라 타고난 소질대로 키워야 한다’는 확고한 소신을 가진 분이셨어요. 사회적으로 따가운 시선을 받을 때 유일하게 저를 밀어주셨던 분이 아버지입니다. 2년 전 (만 100세로) 돌아가셨는데 앞으로 제 가수 활동은 아버지에 대한 추억 속에서 이뤄질 것 같아요. 왜냐하면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어디를 갈 때도 아버지와 늘 함께했거든요. 저 하춘화는 아버지 때문에 가수가 됐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하춘화는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지만 사업을 하던 부친을 따라 다섯 살 때까지 주로 부산에서 자랐다. 그러다 여섯 살 때 가족 모두 서울로 이사했는데, 부친이 동아예술학원으로 하춘화를 데려가서 “우리 아이가 노래에 소질이 있다”며 작곡가들에게 소개했다. 재능을 인정받은 하춘화는 이후 당시 최고 작곡가였던 형석기(1911~94) 선생에게 6개월간 교육을 받았고, ‘천재 소녀 가수 하춘화 가요앨범’이라는 타이틀로 음반이 탄생했다.

국내 현역 가수 중 데뷔 연도 기준으로 최고참이죠?

“여섯 살 때 데뷔했으니 아마 그럴 거예요. 그러다 보니 저보다 나이 많은 후배가 많아요. 가령 태진아(68)·전영록(67)·남진(76) 같은 분들이 많게는 저보다 열 살 정도 위지만 가수 나이로는 제가 선배죠. 그래서인지 그분들이 저한테 쉽게 말을 놓지 못할 때가 많아요.”

참고 견디며 살아온 60년 세월

2009년 하춘화는 자신의 음악 인생을 담은 에세이집 [아버지의 선물]을 출간했다.

2009년 하춘화는 자신의 음악 인생을 담은 에세이집 [아버지의 선물]을 출간했다.

이미자 선생님이 1959년에 데뷔했죠?

“맞아요, 저보다 2년 선배님이에요. 데뷔 60주년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제 나이가 80세쯤, 그러니까 (이미자 선배님과)비슷한 나이인 걸로 알아요. 저 아직 젊답니다(웃음).”

지난 60년 세월을 요약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정말 치열하게, 교과서처럼 열심히 살아왔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 많아요. 올해 102세 되시는 김형석 교수님은 강의에서 ‘인생은 60세부터 75세가 황금기’라고 하시더군요. 지금 20~30대는 이해를 잘 못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백 번 공감합니다. 왜 그 나이가 황금기냐면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기 때문이거든요. 제가 저를 돌아봐도 지금은 스스로 책임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정확한 판단도 내릴 수 있을 것 같고, 또 누군가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면에서 지금 황금기를 맞은 게 맞아요. 아쉬움이 적게 남을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살 겁니다.”

돌아보면 크고 작은 일이 많았죠?

“물론이죠. 돌아보면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쉽게 넘어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나는 못해’라고 돌아섰다면 지금의 제가 없겠죠. 참고 견디고 노력했기에 오늘의 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정확한 데뷔 날짜는 언제인가요?

“음반 내고 데뷔했으니 1961년 12월이 데뷔 월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당시만 해도 녹음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라 군용담요를 벽에 붙여서 방음장치로 사용했어요. 또 지금처럼 악단 따로, 가수 따로 녹음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녹음해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누가 하나의 작은 실수만 나와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전통가요로 따지면 제가 3세대쯤 되는데, 저보다 선배이신 분들은 녹음할 때 더 어려움이 많았겠죠. 요즘이야 편집 기술이 좋으니 끊어서 부르는 게 가능하지만 당시만 해도 가수라면 최소한 1절 정도는 끊지 않고 제대로 부를 수 있어야 했어요. 그런 면에서 1세대 선배님들을 존경합니다. 지금 들어도 노래가 정확해요.”

‘기부 여왕’의 ‘가요 외교’

2019년 10월 영암 ‘한국 트로트 가요센터’ 내 ‘하춘화 전시관’ 앞에 선 하춘화. 마네킹이 입고 있는 의상은 그가 데뷔 40주년 기념 공연 때 입었던 옷이다. / 사진:오종찬

2019년 10월 영암 ‘한국 트로트 가요센터’ 내 ‘하춘화 전시관’ 앞에 선 하춘화. 마네킹이 입고 있는 의상은 그가 데뷔 40주년 기념 공연 때 입었던 옷이다. / 사진:오종찬

가수로서 가장 보람된(기쁜) 일과 아쉬운(슬픈) 일은 무엇인가요?

“가장 기쁘고 뿌듯한 건 제 노래가 국민에 힘과 용기를 드렸고, 슬픔을 달래드렸다는 점입니다. 또 국민이 저를 인정해 줄 때 가수로 큰 보람을 느낍니다. 제 노래가 국가적 현안 해결의 작은 실마리가 됐을 때도 무척 뿌듯했지요.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건 노래와 공부를 병행하는 일이었어요. 아버지는 가수인 저에게 가정교사까지 붙여주시면서 ‘노래를 부르더라도 공부는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거든요.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저는 늘 공부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렸답니다. 또 1972년 시민회관 화재,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를 겪었을 때는 정말 지치고 힘들었습니다.”

최초의 남북 문화예술 교류가 이뤄진 건 1985년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예술공연단 교환 방문 때였다. 방문단은 평양대극장과 서울 중앙국립극장에서 각각 두 차례의 예술단 공연을 펼쳤다. 당시 하춘화는 남한을 대표한 예술인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공연했다. 또 한·일 어업협정 문제가 불거졌던 1999년 3월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가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를 서울 신라호텔로 초청해서 하춘화의 공연을 관람했다. 하춘화는 오부치 총리와 함께 무대에서 일본 노래도 한 곡 불렀는데, 다음 날 주요 신문에 ‘가요 외교’라는 제목의 기사가 크게 실렸다. 하춘화는 “대한민국의 딸로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기부의 여왕’으로도 유명합니다.

“부모님의 교육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어렸을 때, 대중예술인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을 때 히트곡 ‘물새 한 마리’가 나왔어요(당시 16세). 아버지는 ‘사회로부터 받은 사랑을 어려운 사람을 위해 나눌 줄 아는 가수가 돼야 한다. 그래야 대중가수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고 동료·선배·후배들에게도 동기부여가 된다’는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하셨어요. 그 말씀이 계기가 돼서 지금까지도 어려운 이웃과 나누려고 노력하며 산답니다. ‘부모님 말씀 잘 들으니 이렇게 칭찬을 받는구나’는 생각도 하게 되네요(웃음).”

“박사학위 받으려 하루 4시간 자며 버텼죠”

2006년 8월 성균관대에서 열린 학위 수여식에서 자리를 함께한 한혜진·현숙· 하춘화·이혜리· 인순이·설운도 (왼쪽부터).

2006년 8월 성균관대에서 열린 학위 수여식에서 자리를 함께한 한혜진·현숙· 하춘화·이혜리· 인순이·설운도 (왼쪽부터).

하춘화는 2016년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에 가입했다. 하춘화가 지금까지 공연 수익을 통해 기부한 금액은 200억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하춘화는 “(한창 활동할 때만 해도) 서울의 100평짜리 단독주택 1채 가격이 300만~400만원쯤이었다. 공연 후 500만~1000만원을 기부하기도 했다”며 “요즘 학교폭력이 문제인데 경험에 비춰보면 가정교육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가정교육이 절실한 시대”라고 덧붙였다.

연예계를 전쟁터라고들 합니다. 전쟁터에서 6년도 아닌 60년 동안 건재할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합니다.

“열정이 식을 때가 모든 게 끝난 때라고 생각해요. 저는 어려움에 부딪히면 한 템포 늦추고 크게 심호흡을 합니다. 결국 참고 견디는 게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 같아요.”

국내 대중가수 가운데 박사 1호입니다. 노래와 공부를 병행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쉰 살 넘어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요, 정말 힘들었습니다. 오후 늦게 생방송 마치고 부리나케 학교로 뛰어가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학위논문을 쓸 때는 하루에 4시간밖에 자지 못했어요.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논문과 책만 보다 보니까 눈에 고장이 나더군요.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기름샘 구멍이 말라버렸다’면서 치료해 주더군요. 함께 박사과정을 밟았던 동료들이 ‘정말 지독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두 번 할 일은 못 되는 것 같아요(웃음).”

경남대와 방송통신대를 나온 하춘화는 2000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서 ‘한국 가요의 원류와 변천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3전 4기 끝에 2003년 성균관대 일반대학원 박사과정 입학전형(동양철학과 예술철학 전공)에 합격한 하춘화는 ‘사회 변동기의 대중가요와 대중 정서의 상관성 연구’라는 논문으로 2006년 8월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최근 고향에 ‘한국 트로트 가요센터’를 열었죠?

“가수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대부분 ‘영암 한국 트로트 가요센터’가 차지할 겁니다. 한국에 트로트 가요센터는 그곳 하나밖에 없는데, 앞으로 그곳에서 후진 양성에 매진하려 합니다. 현재는 소극장·전시관·가요 역사관·하춘화 전시관 등으로 구성돼 있는데, 교육이 가능한 아카데미 착공에 곧 들어갈 겁니다. 한국 트로트 가요센터는 단순한 가요센터가 아니라 예술학교로서 후세에 물려줄, 영원히 남을 문화유산입니다. 한국 대중가요와 후배들을 위해 어떻게 트로트 가요센터를 키우고, 또 어떻게 후배들을 키울것인지가 큰 숙제입니다.”

지금까지 발표한 곡과 앨범 수가 어마어마하죠?

“어느 해에는 1년에 11장 낸 적도 있었어요. 지금까지 따져보니까 발표한 곡은 총 2500곡 이상 되더라고요. 앨범은 140번째까지 세다가 이후로는 세지 못했습니다(웃음). 그런데 가수에게 진짜 중요한 건 어떤 노래를 부르느냐인 것 같아요.”

발표한 노래만큼이나 공연 횟수도 기록적이죠? 기네스북에 오른 거로 알고 있습니다.

“70~80년대만 해도 흑백 시대라 컬러풀한 모습을 보기 위해 팬들이 공연장을 찾으셨죠. 그때는 추석·설 같은 명절에는 유명 가수의 콘서트·리사이틀이 많이 열렸어요. 저는 명절을 가족과 함께한 기억이 없습니다. 1년 365일 중에서 180일을 공연하기도 했고, 하루에 다섯 번 무대에 오르기도 했어요. 아기 업은 엄마가 1층에서는 사람들에 가려서 (제 모습이)잘 안 보이니까 하는 수 없이 2층으로 올라갔는데 그사이 공연이 끝나기도 했답니다(웃음). 1991년에 공연 횟수 8500회로 기네스북에 올랐으니까 지금까지 총 9000회 정도?”

“노래 열심히 부르되 반드시 공부도 해야”

1974년 동양방송·중앙일보 주최 TBC 방송 가요대상에서 최우수 가수상을 받은 김세환과 하춘화(오른쪽)

1974년 동양방송·중앙일보 주최 TBC 방송 가요대상에서 최우수 가수상을 받은 김세환과 하춘화(오른쪽)

요즘 유행어로 최애곡(가장 사랑하는 노래)이 궁금합니다. 

데뷔 초기의 하춘화. 예나 지금이나 큰 눈망울은 변함이 없다.

데뷔 초기의 하춘화. 예나 지금이나 큰 눈망울은 변함이 없다.

“여러분이 사랑해주신 곡은 모두 제 생명 같은 노래입니다. 그래도 콕 집어서 얘기한다면 첫 히트곡인 ‘물새 한 마리’라고 할 수 있어요. 대중에게 하춘화라는 이름 석 자를 각인시켜준 노래이니까 의미가 있죠. 제 콘서트 레퍼토리에 반드시 들어가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요즘 트로트가 대세입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시나요?

“김치는 매일 먹지만 질리지 않아요. 가끔 양식·중식도 먹고 싶지만 결국 김치로 돌아오는 게 한국 사람이에요. 코로나19라는 사상 초유의 고통을 겪으면서 사람들이 굉장히 본능적으로 돌아간 것 같아요. 다시 말해서 ‘우리 것이 좋은 거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거죠. 80년대 미국 공연을 갔을 때의 일이에요. 한 유학생이 공연 후 분장실로 찾아와서 막 울더라고요. ‘한국에 있을 때는 트로트를 듣지 않았는데 여기 와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고요. 앞으로 팬이 되겠습니다’라고 하면서요. 사람은 어려움이나 외로움에 처하면 본능적으로 돌아가게 돼 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트로트가 좋아지고, 트로트에서 위안을 받는 겁니다.”

요즘 초등학생·중학생이 트로트 경연 무대에 서는 걸 보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저는 굉장히 어렵게 눈치 보면서, 좋지 않은 시선을 받으면서 활동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어느 집안에서든 자녀가 대중예술인이 되겠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또 사회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소질 있는 아이들이 마음껏 재능을 발산하는 걸 보면 굉장히 부럽습니다.”
어린 후배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정동원·김태연 같은 어린 가수들의 재능은 무궁무진한 것 같아요. 중요한 건 그 친구들이 정상적으로 잘 커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려면 부모든 누구든 잘 뒷받침해줘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이상하게 풀리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 친구들을 보면 ‘얘, 공부는 꼭 해야 해. 공부는 하는 데까지 하면서 노래도 불러라’고 말해주곤 합니다.”

건강 관리 비결을 궁금해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우리 직업은 체력 싸움이에요. 건강하지 못하면 공연도 할 수 없어요. 다행히 지금까지는 건강 때문에 뭘 못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건강관리 비법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규칙적으로 소식하고, 생활 속에서 운동을 꼭 합니다. 그리고 병원도 치료가 아닌 예방을 목적으로 갑니다.”

골프도 꽤 수준급이죠?

“뭐 하나에 매달리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에요(웃음). 아버지는 ‘신경을 많이 쓰는 직업이니 이걸 해야 한다’며 골프를 권유하셨어요. 어떤 사람이 ‘노래나 부를 것이지 무슨 골프야’라고 한 적이 있었어요. 그 말을 들은 이후 하루도 안 빼고 연습에 매달렸어요. 나중에 ‘하춘화 골프 좀 친다’는 소문이 나니까 그제야 그 사람이 ‘하 프로님 나오셨어요’라며 허리를 굽히더라고요.”

무대에 서지 않을 때는 어떻게 소일하시나요?

“스케줄 없으면 일반인으로 돌아가요. 시간 쪼개서 지인들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저는 하루 24시간을 잘게 쪼개서 사용한답니다. 길이 막히면 차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신문이나 책을 보는 식이죠. TV를 볼 때도 가만있지 않고 아령 같은 것으로 스트레칭을 하고요. 어떤 친구가 ‘너를 보면 숨이 막힌다’고 하던데…. 저는 되레 시간을 마구 쓰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살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친한 동료는 누구인가요?

“남는 시간에 밥을 먹자, 사적으로 만나자 이런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래도 이따금 통화하고 안부 묻는 사람이라면 설운도·주현미씨 정도? 명절 같은 때 설운도씨는 ‘선배님, 건강하세요.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오곤 합니다.”

“국민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노래 부를래요”

하춘화는 “남은 생은 국민의 삶을 위로하고 후배들을 키우는 데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하춘화는 “남은 생은 국민의 삶을 위로하고 후배들을 키우는 데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요즘도 배우는 게 있나요?

“아버지 말씀을 다 잘 들었는데 딱 한 가지 안 들은 게 있어요. 아버지는 ‘가수라면 피아노를 잘 쳐야 한다’고 하셨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배우기를 게을리했죠. 2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다시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는데, 요즘은 명곡도 칠 정도가 됐답니다.”

무대에 오르기 전후 징크스나 습관은요?

“징크스라기보다는 자세를 가다듬습니다. 반드시 양치하고 손 씻고 옷매무새 가다듬고 신발도 깨끗이 닦아요. 누가 보든 안 보든 그렇게 하는 게 팬들에 대한 예의이자 자기최면이 아닌가 싶어요. 또 하나, 가톨릭 신자이니까 무대에 오르기 전에 성호(聖號)를 그리기도 하고요. 어떤 가수들을 보면 무대 위에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던데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에요. 어떻게 팬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나요? 아무리 목이 말라도 무대 내려온 뒤에 대기실에서 마십니다.”

언제까지 노래 부르고 싶나요?

“죽기 전날까지요. 노래 부르고 무대 내려오다 죽으면 더 좋겠죠(웃음).”

앞으로 목표나 계획도 궁금합니다.

“국민에게 힘과 위로가 될 수 있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또 아까 말했듯이 영암 한국 트로트 가요센터를 반석 위에 올려서 후배들을 키우고 싶기도 하고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런 일들을 하려 합니다.”

월간중앙 독자들 그리고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창간 53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월간중앙을 열렬히 좋아하시는 독자들이 계시기에 월간중앙이 존재하듯이, 저 역시 팬들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앞으로도 변함없는 사랑과 꾸지람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춘화는 80주년 정도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월간중앙은 앞으로도 100주년, 200주년 가겠죠(웃음)?”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신인섭 선임기자 shinis@joongang.co.kr / 녹취 정리 박남화 월간중앙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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