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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권투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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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진석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담당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이놈, 내 돈 잃게 한 해글러 닮았잖아.”

1989년에 만들어진 영화 ‘레드 히트’에서 형사 역의 제임스 벨루시는 천신만고 끝에 검거한 대머리 흑인 범죄 용의자에게 이렇게 쏘아붙였다. 필시 그로부터 2년 전 열렸던 마빈 해글러와 슈가 레이 레너드 간 세기의 대결 때 해글러에게 판돈을 걸었던 것이리라.

1980년대는 프로 권투의 전성기였다. 그 중심에 해글러를 비롯한 ‘미들급 사대천왕’의 물고 물리는 명승부가 있었다. 해글러와 레너드의 일전은 ‘그들만의 리그’의 결승전이었다. ‘경이로운’(Marvelous) 마빈 해글러는 ‘돌주먹’ 로베르토 두란을 판정으로 넘어선 데 이어 ‘히트맨’ 토마스 헌즈를 3회 TKO로 거꾸러뜨리고 레너드와 마주했다. 두란에 한 번 패했던 레너드는 리턴매치에서 그를 8회 TKO로 꺾으며 복수에 성공했고, 헌즈와의 대전에서는 그 유명한 오른손 풍차돌리기 후 연타로 14라운드에 극적인 승리를 거머쥐었다.

레너드는 화려했다. 빠른 몸놀림과 뛰어난 기교에 가공할 연타 능력, 그리고 쇼맨십까지 두루 갖췄던 그는 ‘슈가 보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당대의 스타였다. 반면 해글러는 우직했다. 잔매에 대한 두려움 없이 직진 일변도로 강펀치를 날려 결국 상대를 굴복시키고야 말았다. 두 사람의 경기는 백중세로 진행됐지만, 결과는 레너드의 2대1 판정승이었다. 해글러는 판정에 불복해 재대결을 요구했지만, 레너드가 계속 회피하자 결국 글러브를 벗었다.

당시 권투의 인기는 범세계적이었고, 국내도 예외가 아니었다. 볼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 송재익·한보영 콤비의 목소리와 함께 공중파로 생중계되던 국내외 빅매치들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 대표적 ‘헝그리 스포츠’를 통해 입신을 꿈꿨던 잠재적 ‘개천 용’들도 넘쳐났다. 그 결과 장기 집권했던 장정구·유명우의 양대 산맥을 필두로 무수한 세계 챔피언이 배출됐다. 하지만 다양한 경쟁 스포츠의 부상, 국민소득의 증가로 인한 직업 권투 인구의 감소가 이어지면서 그 시대는 이제 전설의 영역이 됐다.

67세에 불과했던 해글러의 이른 별세 소식이 ‘권투의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꼼수와 잔머리가 횡행하는, ‘좀스러운’ 시대에 두 주먹만으로 승부를 가리는 그 스포츠의 단순함과 우직함이 새삼 그립다.

박진석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