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정하의 시시각각

연금공약은 후보 진실성의 잣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김정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정하 정치디렉터

김정하 정치디렉터

문재인 정부는 안 해도 될 일을 벌였다가 화를 자초한 경우도 많지만, 더 큰 문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좀처럼 안 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가 임무를 방기하면서 차기 정부의 부담을 더욱 키운 대표적 사례가 국민연금 개혁이다.

문, 판타지 공약 걸었다 발목 잡혀 #국민연금, 더 내거나 덜 받거나뿐 #불편한 진실 인정하는 후보 나와야

2017년 4월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유승민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게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40%에서 50%로 올리겠다는데 무슨 돈으로 할 거냐”고 따졌다. 문 후보는 “설계만 잘하면 국민연금 보험료 증가 없이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답했다. 돈을 더 내지 않고도 받는 연금액을 늘릴 환상적 비법이 있다는 장담이었다. 하지만 출산율이 전 세계 최하위인 한국에서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하겠나.

문 대통령이 진짜로 공약이 가능하다고 믿은 건지, 아니면 선거철에 그냥 듣기 좋은 소리를 한 건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한번 던진 공약은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다.

문 대통령은 2018년 11일 보건복지부가 보고한 국민연금 개혁안 3개를 모두 퇴짜 놨다.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3개 안 전부 돈을 더 내는 방향이라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험료는 동결하고 차라리 받는 연금액을 줄이라는 지침을 준 것도 아니다. 복지부 실무자들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오죽했으면 그 무렵 연금 전문가인 김연명 청와대 사회수석이 국회에서 문 대통령 공약에 대해 “이론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토로했을 정도다.

결국 복지부는 그해 12월 ‘현행 유지’까지 포함된 전무후무한 사지선다 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무책임·무소신의 극치를 드러냈다. 정부 입장이 어정쩡하니 20대 국회에서 개혁안이 통과될 리 없다. 21대 국회에서도 연금 개혁 논의는 아무런 진전이 없다. 국회 의석만 놓고 보면 범여권이 절대 다수여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연금개혁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공수처법 처리하듯 말이다.

하지만 이제 문 대통령은 연금개혁안을 처리하겠다는 의지 자체가 사라진 듯하다. 아무리 연구해도 보험료를 올리거나 소득대체율을 낮추는 방법 말고는 없으니, 공약 파기란 욕을 먹을 바에야 차라리 차기 정권에 폭탄을 떠넘기겠단 생각인 듯하다.

이렇게 문재인 정부가 허송세월하는 동안 국민연금의 침몰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지난해 6월 국회 예산정책처는 국민연금 재정이 2040년 적자로 전환돼 2054년에 완전 고갈된다는 추계를 발표했다. 2018년 정부 추계 때 제시한 2042년 적자 전환, 2054년 기금 고갈보다 2~3년씩 앞당겨졌다. 그만큼 저출산·고령화가 심각해져서다.

그나마 이는 2019년 인구 추계를 적용한 것인데, 세계에서 압도적 꼴찌로 떨어진 2020년 출산율(0.84)을 적용하면 기금 고갈은 더욱 앞당겨진다. 이대로 가면 지금 열심히 보험료를 내고 있는 50세 이하 가입자 대부분은 살아생전에 기금이 펑크 나는 걸 목도하게 된다. 그 이후엔 세금으로 연금을 메워야 하는데 치솟는 조세 부담에 격분한 자녀 세대의 반란이 필연적이다. 특단의 대책이 나오지 않는 한 반드시 벌어질 대재앙이다.

돌이켜보면 2년 전에 문 대통령이 공약을 못 지켜서 죄송하다고 대국민 사과를 한 다음 야당의 협조를 얻어 연금개혁안을 처리하는 게 최선이었다. 정권엔 상처가 났겠지만 국가 미래를 위해선 그래야만 했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연금에 비해 쥐꼬리 규모인 공무원연금 개혁을 밀어붙이다가 휘청거렸다. 차기 정부는 국민연금 개혁에 명운을 걸어야 할지 모른다.

앞으로 차기 대선후보들의 국민연금 공약을 눈여겨봐야 한다. 국민연금 공약은 후보들의 용기와 진실성을 평가할 수 있는 좋은 잣대다. 돈을 더 내거나 받는 돈을 줄여야 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고통 분담을 호소하는 후보가 한국의 미래를 구원한다. 당장 듣기에 편한 판타지는 백해무익이다.

김정하 정치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