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영혼까지 털린 벼락거지

중앙일보

입력 2021.03.09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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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팀장
김승현 사회2팀장

김승현 사회2팀장

‘영끌’의 아래는 없을 줄 알았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빚을 내서 집이든 주식이든 산다는 2030의 현실을 이보다 더 처절하게 표현하기는 어려울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기진맥진한 청춘은 다시 뒤통수를 맞았다. 가해자는 ‘철밥통’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공기업 직원들. 그 결과 ‘영털’이 탄생했다.

LH 투기 의혹에 ‘영털’ 등장
‘영끌’ 벼락거지 할 말 잃어
말뿐인 ‘무관용’에 청년 좌절

LH(한국토지주택공사) 직원들이 신도시 발표 지역에 땅 투기를 했다는 의혹이 나오자 2030들은 ‘영혼까지 털렸다’고 했다. 청춘들의 반응을 취재한 후배 기자는 “영끌로 쌓인 불만이 영털로 폭발했다”며 ‘영털’ 현상을 포착했다. 그 분노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걸 보니, 영끌처럼 자주 듣게 될 신조어가 또 하나 탄생한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들었다.

영털에 앞서 ‘벼락거지’라는 말에서도 비슷한 비애를 느꼈다. “월급을 착실히 적금했더니 더 가난해졌다”는 아이러니한 하소연이 담긴 단어다. 부동산이나 주식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지인들의 소식은 성실한 직장인을 ‘갑자기 거지가 된 기분’에 빠트렸다. 영끌로 먼저 집을 산 친구들은 저 멀리 비교도 안 되게 앞서가고, 주식·비트코인 등에 투자한 지인마저 최근의 호황에 자산이 늘었으니 그 상실감은 ‘벼락거지 증후군’으로 나타났다. 다급해진 2030이 대출을 받아 주식 시장에 뛰어든다는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다 ‘찐’ 벼락거지가 속출하는 게 아닌지 두려운 예감이 들었다.

2030 사이에 인기 있는 재테크 유튜버 포리얼(본명 김준영·29)의 진단은 단호하다. 약 15만명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그는 “LH 사태는 단편적 사건에 불과하다. ‘빽’이나 고급 정보가 없으면 계층 역전은 불가능하다는 게 청년들의 지배적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LH 사태는 순수한 노력으로는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걸 절감한 청년들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기대의 싹을 짓밟았을 공산이 크다. 벼룩의 간을 내어 먹듯이, 벼락거지의 영혼마저 털어먹은 셈이다.

서소문 포럼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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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의 좌절은 이제 바닥을 친 것일까. ‘1층이 바닥인 줄 알았더니 지하실이 있더라’는 증권가 교훈처럼, 나락의 끝이 아닐 수 있다. 청년을 좌절시킬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이번 사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도 아슬아슬한 사건이 계속될 것 같다. 인터넷에 올린 글이라지만, 이 시점에 “LH 직원은 투자하면 안 되냐”는 게 웬 말인가. 투기 의혹 시점에 LH 사장이었던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은 “직원들이 미리 알고 땅을 산 건 아닌 것 같다”는 ‘관대함’까지 보여줬다. 이러니 ‘무관용의 조치’(홍남기 경제 부총리)를 공언하는 정부를 믿을 수 있겠는가.

정부가 선(先) 조사 후(後) 수사로 방향을 잡았다는 소식에도 불길한 예감이 든다. 수사보다 강력한 정부 대응이 있었는지 고개가 갸우뚱거려져서다. 지난 4일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예고하며 검찰을 떠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이미 수상한 냄새를 맡은 듯하다. 그는 최근 언론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오는 4월 보궐 선거를 의식해서 조사·수사를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또 증거인멸이 우려된다며 “여든 야든 책임있는 정치인이라면 신속하고 대대적인 수사를 촉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사건에 정치공학적인 속도조절이 개입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도 이미 정치공학에 편입됐지만, 2005년 2기 신도시 투기 의혹을 수사한 전문가의 경험에서 나온 발언을 외면할 수는 없다.

정부 합동조사 이후의 수사 상황도 불안 요소가 산적해 있다. 검찰은 이번 수사에 제약이 있다. 검·경 수사권 조정에 따라 직접 수사 대상이 6대 범죄(부패·경제·공직자·선거·방위사업·대형참사)로 축소된 데 따른 일이다. 새로 출범한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이번 수사를 이끌며 ‘데뷔’하게 된다. 남구준 국가수사본부장은 8일 첫 기자간담회에서 수사를 검찰에 맡기자는 일각의 주장에 “경찰이 부동산 특별 단속을 해오면서 역량을 높여왔기 때문에 검찰에 수사를 맡겨야 한다는 데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의 자신감을 영털 청년들도 100% 믿어 주면 좋으련만. 문재인 정부 내내 시끄러웠던 검찰 개혁, 수사권 조정, 수사와 기소의 분리 등의 논란은 청년들에겐 복잡하고 서툰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정의와 공정을 해치는 바이러스 앞에서 치료제와 백신을 믿지 못하는 청년들. 영혼이 털린 그들 앞에 허무맹랑한 돌팔이만 설치는 것 같아 안쓰럽다. 이 나라의 청춘에겐 너무나 잔인한 봄날, 제발 영혼을 잘 간수하기를 바랄 뿐이다.

김승현 사회2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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