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보수가 승리하려면

중앙일보

입력 2021.03.10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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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팀장
서승욱 정치팀장

서승욱 정치팀장

벌써 몇 주째인지 모른다. 토요일마다 휴일의 정적을 깨는 방해꾼이 있다. 오후 3시 전후로 10분 가까이 귀청을 때리는 국적 불명의 랩과 노랫소리에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소음 테러다. ‘도대체 어떤 X들이야~’ 욱하는 마음에 큰 길까지 달려나가 보니 소음 유발자의 정체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잔뜩 매단 봉고차였다. 그 봉고차 뒤를 ‘4·15 부정선거 사형’이란 깃발로 무장한 승용차 두세 대가 따랐다. “주사파, 남로당 후예들을 이번 선거에서 심판하자. 부정선거 책임자를 사형시켜야 한다”는 구호가 이어졌다.

윤석열 사퇴과정서 본 여당 민낯
보수 고립과 국민 갈라치기 프레임
아스팔트 아닌 중원을 공략해야

집 주변은 젊은이들이 꽤 많이 모이는 곳이다. 난데없는 태극기 부대의 출현과 ‘주사파 남로당’랩을 접한 행인들의 짜증스러운 표정에서 ‘공감’은 읽히지 않았다. 일본 특파원 시절 도쿄 긴자의 사무실 주변을 요란하게 누비던 우익 차량을 봤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유치한 장식과 주장, 자신들은 스스로의 퍼포먼스에 흠뻑 취했을지 몰라도 멀쩡한 시민들은 눈길도 주지 않는다.

소음 유발자들이 ‘주사파, 남로당의 후예’로 부르는 상대는 결코 간단한 사람들이 아니다. 믿기 싫겠지만, 그들은 태극기 부대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있다. 걸핏하면 내 편 네 편으로 국민들을 갈라치기 한다. 교묘한 프레임으로 상대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도 이들의 특기다.

최근 종합편성채널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한 민주당 측 인사의 말에 경악한 일이 있다. 그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사퇴 직전 대구에 간 걸 거론하며 “극우파처럼 행동했다”고 말했다. 대구를 극우파 소굴쯤으로 단정하는 발언에 또 다른 출연자가 “대구에 가면 극우파냐”고 발끈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말을 “일부에만 해당되는 얘기”라며 거둬들였다. 민주당에 반대하면=극우, 대구=극우 소굴, 따라서 대구에 간 윤석열은=극우파 대장이라는 인식 구조다. 비상식적이고 천박한 프레임이지만 이런 주장이 한국에선 의외로 먹힐 때가 많다.

서소문 포럼 3/10

서소문 포럼 3/10

그들은 치고 빠지기와 둔갑술도 선수급이다. 상대는 가해자, 자신은 피해자 구도를 만드는 데 특히 귀신같은 재주가 있다. ‘추미애-윤석열 갈등’을 방치했던 대통령은 추미애 전 법무장관이 올린 윤 총장 징계안을 자신의 손으로 재가했다. 윤 총장을 몰아내려는 궁리에 박자를 맞춰 놓고도 기자회견에선 “윤 총장은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라고 했다.

검찰 출신 신현수 전 민정수석의 등용도 마찬가지다. 진정으로 검찰과의 화해를 원했다면 당연히 그에게 힘을 실어줬어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박범계 법무장관의 인사 독주와 ‘신현수 패싱’이었다. “살아있는 권력에도 똑같이 엄정하게 해달라”는 대통령 ‘지시’를 따랐다가 갖은 박해를 당한 걸 삼척동자도 아는데, 여권은 “대통령 등에 칼을 꽂았다”고 윤 전 총장을 비난한다. ‘검수완박’ ‘검찰 개혁 시즌 2’라는 명분으로 검찰을 몰아치고도 이제와선 “서두를 생각이 없었는데 윤 총장이 정치적 야심 때문에 직을 던졌다”고 손가락질을 한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들의 세계에선 ‘정치에 물든 윤석열이 착한 정권을 물어뜯는’ 내용으로 바뀐다. 대구를 극우파의 소굴로 몰아가듯 “시대에 뒤떨어진 탄핵 잔당”이라며 끊임없이 보수세력을 고립시키려 할 것이다. 대선이 임박할수록 훗날을 위해 아껴둔 전직 대통령 사면 카드 등 국민 분열을 노린 아이디어들이 총출동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대와 싸우기 위한 보수의 선택은 상식이 통하는 중도층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길 밖에 없다. ‘상식 대 상식’의 싸움에서 보수 쪽에 공감하는 내 편을 늘리는 일이다. 중원을 차지하는 것 외엔 답이 없다. 정치권에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보수정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던 이들 중 20%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분석이 있다. 4·7 재·보궐 선거와 내년 대선 승리를 위해선 이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보수의 선결 과제다.

선뜻 공감하기는 어렵지만 “부정선거 사형” “주사파 남로당 심판” 주장에도 나름의 이유와 근거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수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힘든 주제로 휴일 주택가에서 확성기를 틀어대는 건 그토록 혐오하는 상대방의 작전에 말려드는 일이다. 보수세력에 대한 혐오를 극대화하려는 의도에 맞춰 춤을 추는 일과 다르지 않다.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 시작했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상대를 이롭게 하는 행위일 뿐이다.

진정으로 이기고 싶다면 머리를 좀 쓰시라. 정교한 전략없이, 자기만족을 주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이길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상대는 만만하지 않다.

서승욱 정치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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