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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보내준다"던 선배 배신…21세, 축구화 벗고 공장 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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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밖에 모르던 중학교 시절의 조성협씨. 사진 조성협씨 제공

축구밖에 모르던 중학교 시절의 조성협씨. 사진 조성협씨 제공

"아직도 공 찰 때가 그립고 억울해서 잠이 안 와요." 

지난 4일 인천 남동구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난 조성협(21)씨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또렷했다. 과거 사진을 꺼내 들 땐 눈가엔 눈물이 고였다. 한때 축구 꿈나무였던 조씨는 지난 1월부터 인천의 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해 축구화를 벗은 뒤 고향 부산을 떠나 이곳에 왔다. 평생 자신을 뒷바라지해온 아버지에게 더는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다. 작은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님과 공 차는 게 행복했던 아들. 단란했던 이들 가족의 꿈을 산산조각낸 건 조씨가 ‘선생님’이라 부르던 축구계 선배 도화성(40)씨였다.

유럽행 제안에 택한 고교자퇴

조성협씨(왼쪽)와 그의 아버지. 사진 조성협씨 제공

조성협씨(왼쪽)와 그의 아버지. 사진 조성협씨 제공

처음 축구화 끈을 맨 초등학교 6학년 이후 조씨는 쭉 부산에서 공을 찼다. 왼쪽 수비수였던 그는 촉망받는 선수였다고 한다. 2017년 고교 축구부에서 훈련에 매진하던 그에게 뜻밖의 제안이 왔다. 전직 프로축구 선수 도화성씨였다. 도씨는 “내가 속한 회사가 큰 곳이라 크로아티아 축구팀에 입단시켜줄 수 있다”며 “일단 구단 유소년팀에 들어가고 18세가 넘으면 성인 프로팀에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크로아티아에 가려면 고등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학교에선 “가장 중요한 시기에 어딜 가냐”며 조씨의 자퇴를 만류했다. 금액도 부담이었다. 도씨는 대가로 6000만원을 요구했다. 조씨 아버지는 아들의 꿈을 위해 힘들게 돈을 마련했고, 조씨의 도전이 시작됐다.

그해 5월 조씨는 부푼 꿈을 안고 크로아티아로 떠났다. 하지만 현실은 약속과 달랐다. 경기 출전은커녕 훈련에도 겨우 참여하던 조씨는 한 달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도씨는 “리그가 막바지고 휴가철이라 기회가 적으니 일단 귀국하자”면서 필리핀행을 권했다고 한다. 필리핀에서 영어공부를 하고 고교 졸업증을 받자는 제안이었다. 도씨는 필리핀행 명목으로 200만원을 추가로 요구했다. 하지만 도씨가 추천한 필리핀 어학원에서는 졸업장을 주지 않았다. 이번에도 조씨는 소득 없이 돌아와야 했다. 조씨는 “도화성씨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에게 저와 함께 일본에 가서 중요한 경기를 봐야 한다며 다시 200만원을 달라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수상한 행동에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도화성씨와 조성협씨의 아버지가 체결한 계약서. 사진 조성협씨 제공

도화성씨와 조성협씨의 아버지가 체결한 계약서. 사진 조성협씨 제공

도씨의 석연찮은 말과 행동은 계속됐다. 그해 7월 또다시 돈을 요구한다. 조씨가 세르비아 프로축구팀과 연봉 1억원에 2년간 계약했으니 성공사례금으로 1500만원을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도씨는 봉투에 든 외국어 계약서를 보여주며 “조씨가 성인이 되는 2018년에 정식 입단을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문서에는 조씨에 대한 계약 내용이 아닌 성인이 되면 어떤 형식으로 계약하는지 설명하는 내용이 담겼다.

조씨는 도씨를 믿고 2017년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크로아티아와 한국을 오가며 여러 팀을 전전했다.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끼니까지 직접 해결했다. 그 무렵 과거 도씨가 K리그 승부조작 건으로 제명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계약을 일임한 도씨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도씨는 “승부조작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 연루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2018년 5월 세르비아 구단 입단 날짜로 약속한 날이 다가왔지만 도씨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조씨를 국내 축구시설에 머무르게 하며 가을까지 출국을 미뤘다. 조씨의 아버지에겐 상황을 숨긴 채였다. 그해 10월 20일이 돼서야 도씨는 조씨와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목적지는 세르비아가 아닌 크로아티아였다. 참다못한 조씨가 강하게 항의하자 도씨는 “축구 계속하고 싶으면 내 말을 따르라”며 윽박질렀다고 한다. 몰래 숙소를 떠난 조씨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한국에 돌아왔다.

法 “죄질 나쁘다”며 도씨 법정구속

조성협(오른쪽)씨가 스웨덴 한 프로팀에서 입단테스트를 받고 있다. 사진 조성협씨 제공

조성협(오른쪽)씨가 스웨덴 한 프로팀에서 입단테스트를 받고 있다. 사진 조성협씨 제공

사태가 커지자 도씨는 돈을 돌려주겠다며 수습에 나섰지만 이조차 기일을 넘겼다. 결국 조씨 아버지가 법적 대응에 나섰고 2019년 말 도씨는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과정에서 도씨는 “조씨가 축구팀에 입단할 수 있었는데 스스로 사라져버려 입단하지 못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천지법 형사6단독 김상우 판사는 도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고 7일 밝혔다. 재판부는 “도씨가 유럽 축구팀 입단을 미끼로 피해자 아버지로부터 7900만원을 받아 가로채 죄질이 상당히 불량하다”면서 “조씨는 결국 축구선수를 그만두게 됐고 현재까지도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도씨는 범행을 부인하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엄벌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도씨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언젠가 축구계 돌아가고파”

조성협씨가 인천 남동구 한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사진 조성협씨 제공

조성협씨가 인천 남동구 한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사진 조성협씨 제공

“전부 포기하고 싶고 사람이 무서워지더라고요.” 어린 나이에 축구계 선배에게 입은 상처는 컸다. 축구는 물론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었다. 재판까지 이어진 공방 탓에 건강도 악화했다. 실의에 빠진 조씨를 일으켜 세운 건 아버지의 한 마디였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도화성에게 지는 거다.” 더는 가족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조씨는 인생 2막 출발선에 다시 섰다. 일단 뭐든지 하며 악착같이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게 그의 뜻이다. “축구밖에 몰랐던 터라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중엔 꼭 축구코치나 에이전트가 돼서 저같이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선수들을 돕고 싶어요.”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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