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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이란의 한국 선박 억류, 한·미 공조가 답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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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달 4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아랍에미리트로 항해하던 중 이란 혁명수비대에 나포된 화학운반선 한국케미호. 이란 국영방송 IRIB가 공개한 현장 모습이다. [IRIB 캡처]

지난달 4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아랍에미리트로 항해하던 중 이란 혁명수비대에 나포된 화학운반선 한국케미호. 이란 국영방송 IRIB가 공개한 현장 모습이다. [IRIB 캡처]

우리 화학 운반선 ‘한국케미호’를 억류 중인 이란 정부가 ‘가짜 뉴스’나 다름없는 언론 플레이 공세를 펼치고 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지난 23일 “한국 등에 묶여 있는 동결 자산을 돌려받기로 했다. 적(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징조”라고 말했다. 이란 정부 대변인실도 한국이 이란에 지불해야 할 원유 대금 70억 달러(약 7조7000억 원) 중 우선 10억 달러(1조1000억 원)부터 돌려받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우리 정부 입장과 명확히 배치된다. 외교부는 “양국 간 의견 접근은 있었지만 미국과 협의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밝혔다. 동결 자금 중 일부를 이란의 유엔분담금 미납분 대납과 백신 구매 등 인도적 목적에 쓰자는 기존 협상안에서 논의가 진전된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란 측은 대통령까지 나서 동결 자산을 돌려받기로 했다고 강변했다. 외교 관례를 무시한 중대 결례다. 한국케미호를 억류한 지난달 4일 이래 이란 정부는 이런 무리한 언론 플레이를 계속해 왔다. 동결 자금의 이자를 받아내기로 했다는 등 사실과 다른 발표를 거듭했다.

이란의 이런 행보는 미국과 맺었던 이란 핵협정(JCPOA) 복귀를 둘러싸고 동결 자금 이슈를 부각해 협상에서 우위를 선점하는 한편, 6월 대선을 앞두고 국내 강경파를 달래려는 의도로 관측된다. 그렇더라도 한국과 줄다리기 중인 사안을 타결된 양 발표한 건 명백한 ‘반칙’이다. 한국이 이란산 원유 대금을 동결한 원인은 미국의 대이란 제재 때문이며, 인도적 목적의 자금 해제조차 미국이 동의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란은 명심해야 한다.

정부도 이란과 협상하면서 미국과 제대로 협의를 거쳤는지 의문이다. 이란이 “한국 정부가 동결 자금을 해제하기로 했다”고 발표한 직후인 24일 미 국무부 대변인은 “한국과 이 문제를 협의 중”이라며 “한국 외교부 장관이 오직 미국과의 협의 후에만 (동결 자금이) 해제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고 강조했다. 혹여 미국과 충분한 조율 없이 이란에 동결 자금 일부 해제 카드를 던졌다가 이런 코멘트가 나온 것은 아닌지 짚어봐야 할 것이다.

이번 사태는 우리 정부의 외교 다변화에도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한국과 이란은 수교 54년 만인 2016년 정상회담을 열고 포괄적 파트너십을 맺었지만 현 정부 들어 고위급 교류가 눈에 띄게 줄며 관계가 서먹해진 끝에 우리 선박과 선원들이 장기 억류되는 참사를 맞았다. 남북관계에만 집중하는 폭 좁은 대외정책으로는 세계 10위권 대한민국의 외교 수요에 부응할 수 없다. 정부는 유라시아와 중동·중남미 주요 국가들과 고위급 교류를 늘려 외교 다변화에 힘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