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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2월 수상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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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장원〉

고다
-김미경

복닥복닥 걸어온 한 생애를 읽는다
쇠심줄 돋우며 달구지 짊어진 길
뼛속에 돋을새김 한 우직을 풀어낸다

커다란 두 눈으로 세상을 굴리며
변죽 울듯 끓는 바람 쇠귀에 경을 읽고
채찍질 멍에 진 등짝 이골이 다 배겼다

한나절 턱 괴어 시간 함께 고는데
울멍울멍 삭힌 말 그제야 녹는다
말로는 다 뱉지 못한 골수 박힌 저 진국

◆김미경

김미경

김미경

1966년 대구 출생. 이화여대 사범대학 졸. 대구 교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재학중. 2019년 이조년백일장 차상. 2020년 중앙시조백일장 7월 차상. 팔공산 다락헌 회원.

〈차상〉

참깨 밭
-문희원

타닥타닥 울음소리 애타기만 하여라
땅심을 부여잡은 푸른 탯줄 끊어지면
여린 것 강보에 싸여
햇살 세례 받는다

여기는 다산면 행복마을 12번 길
찜통더위 달아올라 숨이 가쁜 산비탈
참깨 밭 다둥이네엔
배냇냄새 자욱하다

복대 맨 허리춤 깍짓동 풀어놓고
바람 삼킨 구슬땀 손등을 내리칠 때
꿈꾸던 인큐베이터
신생들 쏟아진다

〈차하〉

쉼표
-황병숙

바람이 억새밭에
속울음 키우듯

길 위에 흔들리며
우리 삶 젖어올 때

달려온
숨 가쁜 나날
쉬어가는 그네 하나

〈이달의 심사평〉

2월은 겨울의 끝자락이자 봄을 앞두고 있다. 곧 날은 풀릴 것이다. 내면의 울림을 통해 민족의 전통시가인 시조를 잘 갈무리하려는 작품 투고자들의 열정은 그래서 더 새롭다.

장원으로 김미경의 ‘고다’를 올린다. 턱을 괴고 앉아서 소뼈를 고아 국물을 우려내는 과정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 국물은 고단한 서민의 삶을 북돋아주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복닥복닥 걸어온 한 생애’를 돌아보는 일은 그래서 고르지 않게 살아온 화자의 삶과 등치된다. 평범한 소재에서 깊은 사유를 이끌어내며 시조의 리듬을 잘 살려 시어를 배치하는 솜씨가 비범하다.

차상에는 문희원의 ‘참깨 밭’을 선한다. 참깨를 털면서 참깨와 신생을 함께 끌어내는 착상이 신선하다. 출산율의 저하를 걱정하고 다출산을 장려하며 권장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참깨가 놓인 자리에 ‘탯줄’ ‘강보’ ‘다산’ ‘다둥이네’를 연상하여 등가시키는 시선이 기발하다. ‘다산면 행복마을 12번 길’에 웃음이 꽃피겠다.

차하로는 황병숙의 ‘쉼표’를 뽑는다. 깔끔하고 명징한 단수시조 한 편이다. 길 위에서 흔들리는 우리들의 삶이 다를 게 없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 쉬는 곳에 흔들리는 ‘그네’가 있는 것이 절묘하다.

심사의 재미를 느끼게 해준 투고작 중에는 한영권, 최영근, 권선애, 김재용, 이상마의 작품이 있었다.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서숙희ㆍ김삼환(대표집필 김삼환)

〈초대시조〉

손도마 
-정경화

골목시장 묵집 할매는
손바닥이 도마다

단단한 나무가 된
물컹하던 손금의 길

수십 년
난전에 내놓은
값을 잃은 골동이다

◆정경화

정경화

정경화

2001년 동아일보,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이영도문학상 신인상,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대구문학 작가상 수상. 시조집『풀잎』 『편백나무 침대』. 한결동인.《시조21》편집주간. 민병도갤러리 관장.

“손바닥이 도마”라는 시인의 말을 믿고 “골목시장 묵집 할매”의 손바닥을 생각해 본다. 말캉거리는 묵을 올려놓고 숭덩숭덩 달인인양 썰고 있겠지만 날카로운 칼날이 만든 수많은 상처들이 어지러운 무늬로 남아있을 것이다. 굳은살로 다져졌을 그것은 긴 세월 후 “단단한 나무”가 되었다 하니 다시  그 말을 믿고 그 나무에 매달려 있을 가지들을 생각해 본다. 바람 잘 날 없다 해도 때가 되면 그 가지들은 꽃을 피우고 열매도 맺었을 것. 우직한 뿌리로 온갖 바람들을 다 이겨내고 지문도 손금도 희미해진 운명 같은 “손금의 길”을 따라 묵묵히 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귀하디귀한 “골동”이 되었을 것이다.

국립발레단 단장인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이 생각난다. 혹독한 연습으로 한 시즌 토슈즈를 250켤레나 닳게 한다는 그녀의 발이. 검게 변한 발톱들과 수십 개의 돌멩이를 박아 엮어놓은 것 같은 울퉁불퉁한 발가락이 찍힌 사진 한 장을 처음 보던 날. 그날 휘몰아치던 충격과 감동이 생각난다. 한국 발레를 세계적인 무대에 올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토슈즈 속 피와 고름들이었다는 것을 알고 흘렸던 눈물도. 그토록 못생긴 발이 어쩌면 그렇게 숭고할 수 있는지!

아, 상처투성이 박지성의 거친 발도, 굳은살로 뒤덮인 이상화의 돌 같은 발도 생각해 보니 다시 눈물겹다. 가장 아름답지 않은 것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이 역설은 도대체 무엇인가.

강현덕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e메일(choi.jeongeun@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응모편수 제한 없습니다. 02-751-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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