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조 백일장] 1월 수상작

중앙일보

입력 2021.01.28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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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장원〉

고궁(古宮) 문살

-김호

은밀히 새 나오는 숱한 비밀 들었지만
격자의 틀 안에서 침묵으로 재웠습니다
세월의 모진 비바람 창호지는 찢기고

안과 밖의 소리를 조화로이 품으며
귀 열어 조심스레 경계를 지켰습니다
깍지 낀 손 놓지 않고 시간을 묻었습니다

결이 트고 갈라져 온몸이 삐걱대도
지켜온 지조와 결의(決意) 잊지 않았습니다
빛바랜 육신이지만 향기만은 남겼습니다

◆김호
김호

김호

1949년 부산 출생, 부산대 수학교육과 졸, 2006년 중앙시조백일장 차하, 2007년 시조문학 신인상, 부산시조시인협회 회원.

〈차상〉

편백나무 숲 

-이성보

산중의 화선지에 정적이 먹을 갈아
빽빽이 휘갈겨 쓴 홀소리 ‘ㅣ’자들로
고요가 붓대 잡고서 서체 계속 다듬는다

차분한 정자체를, 활기찬 흘림체를
텃새와 말벗바람, 의견이 분분해도
수백 년 풍채 힘 모아 필획수련 끊임없다

하늘땅 맞닿도록 치솟는 기세만큼
넉넉히 양팔 낮춰 누운 풀도 다 보듬고
획 굵은 정신일도(精神一到)를 뿜어대는 피톤치드

〈차하〉

옥탑방 

-서기석

발치에 마을 품어
하늘과 맞닿은 곳

수만 평 저 미리내
이마 위에 펼쳐놓고

밤마다
별을 새긴다
우화등선 꿈꾸며

〈이달의 심사평〉

새해다. 새해 첫 달이어서 응모편수나 작품에 대한 기대가 컸음에도 평년 수준에 머물렀다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몇몇 새로운 이름들의 도전을 만나서 반가웠다.

이달의 장원은 김호의 ‘고궁(古宮) 문살’로 선정했다. 이미 익숙한 소재이기는 하나 고궁의 문살을 통해 우리 역사의 부침과 애환의 무늬를 낮고 곡진한 어조로 풀어 놓았다. 묵묵히 왕조를 지키는 충신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격자의 틀”을 “침묵”으로, “안과 밖” “품으며” “열어” 등의 시어들을 ‘문’과의 호응으로 이끌어 낸 점도 눈여겨보았다. 굳이 경어체를 쓰지 않았으면 가락이 더 유장하게 살아났을 것 같은 아쉬움이 있다.

차상에는 이성보의 ‘편백나무 숲’으로 선했다. 산(숲)을 화선지로, 편백나무의 곧은 줄기를 “홀소리 ‘ㅣ’자들의 획으로 본 점이 신선했다. 차하로 선한 서기석의 ‘옥탑방’은 단수시조의 모범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간결하고 깔끔한 시어로 옥탑방이 상징하는 오늘의 소외와 결핍을 비교적 선명한 이미지로 처리하였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하였으니 소재의 기발함을 찾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는 보편적이고 평범한 소재를 어떻게 다르게 인식하고 그것을 내면화하는가에 더 천착해야 할 것이다. 김재용ㆍ이인환ㆍ권선애의 작품을 눈여겨보면서 분발과 정진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 김삼환 서숙희(대표집필 서숙희)

〈초대시조〉

은결

-염창권 

직유가 햇빛이라면 은유는 달빛이다
문고리 달빛 닿자 원환의 파동 인다

허공에 푹 찔러 넣은 은결 모래 쏟을 때

허구의 역사는 피었다가 그냥 진다
적어도 1만 년의 상상력으론 그렇다

월인(月印)의 만경 파랑이
네 살 속에 꽃 필 때 …

◆염창권
염창권

염창권

1960년 전남 보성 출생. 시집 『햇살의 길』 『마음의 음력』 『한밤의 우편취급소』 등. 중앙시조대상, 한국시조시인협회상 등 수상.

장강에 빠진 달을 건지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중국의 시선 이백. 그의 이 낭만적 전설은 천 년을 넘게 떠돌아 이웃 나라에 사는 우리도 익히 알고 있다. 수많은 자료를 통해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지만 사람들은 이 거짓 전설을 믿고 싶어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달을 천하의 이백도 그토록이나 사랑했다는 것이니! 해처럼 군림하지 않는 달, 은은하게 다가오는 소리를 가진 달. 그러나 자유로운 마음을 가진. 그래서 그런지 몸도 하나의 형태만을 고집하지 않는. 언제나 낯설고 신선한. 둥글었다가, 반쪽이었다가, 눈썹 같았다가, 이내 사라져 조바심 나게 하는. 늘 먼저 다가왔다가 또 먼저 뒷걸음치는. 어떤 때는 벅찬 것을 손에 쥐어주지만 이내 또 빼앗아버리는 변덕 심한 애인 같은. 그래도 늘 기대하며 기다리는. 때로는 아찔할 정도의 황홀경을 만드는. 전설 속 이백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인들은 달을 무척 사랑한다. 달에 의지하고 살아가는 시인들도 부지기수다. “직유가 햇빛이라면 은유는 달빛이다”라고 단언하는 이 화자도 하루 한 끼는 달빛을 먹고 살 것 같다. 직유가 합리와 논리를 대놓고 빚어내는 명쾌한 비교 도구라면 은유는 여기저기 은근히 숨겨놓고 찾아보게 하는 애간장의 사랑 놀음 같은 것. 얼마나 매혹적인가. 매혹이 아니라면 논리를 슬그머니 넘어선 진실일 터. 그러니 은유가 시의 기본 언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언어들의 기막힌 객관적 상관물이 되어주는 달. 이 달만 있으면 시도 영원히 있을 것이다.

강현덕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e메일(choi.jeongeun@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응모편수 제한 없습니다. 02-751-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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