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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레임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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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진석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담당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레임덕(lame duck)은 원래 18세기 런던 증시에서 부채가 많아 거래 중지된 중개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단어가 본격적으로 대중화한 곳은 미국 정치판이었다. 협의(狹義)의 레임덕은 잔여 임기 동안 뒤뚱거리며 걷는 오리 신세와 다를 바 없다는 의미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에게 주로 사용됐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최신 용례를 보여줬다.

광의(廣義)의 레임덕은 ‘권력 누수 현상’이라는 의역이 보다 명확하게 그 의미를 전달한다. 임기 말 대통령의 영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경우를 주로 일컫는다. 우리나라에서는 5년 단위의 정기행사다. 레임덕 기간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행위에도 어김없이 도돌이표가 붙는다. 여당이 구차하게 당헌까지 바꾸면서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고 총력전을 펼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레임덕은 그 적용 범위를 점점 넓히고 있는 듯하다. 잔여 임기가 걱정스러운 비선출직 공직자들이 속속 등장하면서다. 첫 손에 꼽히는 건 대법원장이다. 거짓말이 폭로된 데 이어 정치적 거래 의혹성 발언으로 삼권분립 위배 논란까지 불러일으키면서 위엄과 권위가 추락한 그 대법원장 말이다. 그는 피고인에게 위증 경고를 해야 하는 형사법정의 판사들에게 원죄를 안겼고, 판결의 정치적 뒷배에 대한 의심의 시선까지 감수하도록 만들었다. 한 고검장의 취임사를 인용하면 “사법에 대한 신뢰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법원이 조롱거리로 전락한 참담한 상황”이다. 판사들이 면종(面從) 할지언정 복배(腹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의 임기는 2년 반이나 남아있다.

검찰도 만만치 않다. 리더십이 바닥을 파고 들어갔을 뿐 아니라 잠재적 형사피의자이기도 한 서울중앙지검장을, 권력은 기어이 멱살 잡아 일으켰다. ‘틀린 적이 없는 슬픈 예감’대로 권력이 그를 후임 검찰총장으로 삼는다면 그 역시 앞으로 2년 반 더 검사들 위에서 군림하게 된다. 하지만 검란(檢亂)으로 다져진 검사들이 복종은 고사하고 그를 인정이나 하려 할지 의문이다.

레임덕 기간이 길수록 조직과 국민이 떠안아야 할 피해는 커진다. 레임덕이 초래한 동티가 권력에 직격탄을 날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삼권분립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본인들과 권력의 숙고가 필요해 보인다.

박진석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