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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가 좋은 계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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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혜수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장혜수 스포츠팀장

장혜수 스포츠팀장

1871년 6월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한장 있다. 환한 표정의 조선 남성이 맥주병을 잔뜩 안고 있다. 미국 해군 아시아 함대가 강화해협에 정박했을 당시다. 우리가 서양식 맥주를 처음 만난 순간으로 추정한다. 서양식 맥주가 국내에서 처음 생산된 건 1933년이다. 삿포로 맥주(조선맥주 전신)와 쇼와 기린 맥주(동양맥주 전신) 공장이 서울 영등포에 들어서면서다. ‘서양식’이라고 한 건 이미 조선에 맥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2001년 서울 청계천 8가 고서점에서 『산가요록(山家要錄)』(1450년)이라는 책이 발견됐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조리서다. 조선 초 전의감 의관을 지낸 전순의가 썼다. 230여 가지 음식의 제조법 및 저장법을 기록했다. 양조법인 ‘주방(酒方)’ 편에 ‘맥주(麥酒)’가 나온다. 이름은 덧술 재료로 보리쌀(麥米)을 쓰기 때문일 뿐, 막걸리와 비슷하다. 제조법 끝부분에 ‘그 맛과 향이 오래돼도 변치 않으니 따뜻한 계절에 가장 좋다(其味香 例久而不變 最宜暖節)’고 적었다.

인류가 맥주를 처음 양조한 시점은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기원전 1만 년 이전은 아니라는 거다. 농경으로 원료 곡물을 재배한 이후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기원전 4000년경 그림문자 중에는 항아리에 빨대를 꽂아 맥주를 먹는 모습이 있다. 지금부터 6000년 전이다. 맥주에 관한 기록은 기원전 2700년경 수메르인이 쓴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나온다. ‘맥주를 마셔라, 그것이 이 땅의 관습이야’ ‘그는 맥주를 마셨네, 7잔이나! 그리고 마음이 열렸고 즐거워서 노래를 불렀네’ 등의 구절이 나온다.

고대 이집트인도 맥주를 많이 마셨다. 고대 문헌에 맥주를 뜻하는 ‘헥트(hqt 또는 hekt)’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13일 이집트와 미국 연구팀이 카이로 남쪽 나일 강 서안 아비도스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 맥주 양조장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5000년 전인 나르메르 파라오 시대(기원전 3150~2613년) 유적으로 추정했다. 이집트 신화에는 맥주 덕분에 인류가 포악한 하토르 여신을 제압하고 구원받은 이야기가 있다.

‘맥주가 가장 좋다’는 따뜻한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밤 10시를 넘겨도 5명 이상 함께 마음 열고 즐겁게 맥주잔을 기울일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그게 우리의 구원이 아닐까.

장혜수 스포츠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