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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현영의 워싱턴 살롱

‘바이 아메리칸’ 트럼프 똑 닮은 바이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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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박현영 기자 중앙일보 경제에디터
지난해 9월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가 미시간주에서 자동차 노조원들을 상대로 유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해 9월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가 미시간주에서 자동차 노조원들을 상대로 유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 대통령 선거 두 달 전인 지난해 9월 초. 조 바이든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외곽에 있는 전미자동차노조(UAW) 제1지역 본부를 찾았다.

연방정부 미국산 구매 행정명령 서명 #“제조업 부활” 러스트벨트 표심 잡기 #기업 경쟁력 하락, 일자리 창출 미지수 #중국산 상품 고율 관세 철회할지 침묵

포드와 제너럴모터스(GM) 자동차를 배경으로 야외 주차장에 마련된 연단에 선 그는 노조원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미시간에서 만듭시다. 미국에서 만듭시다. 우리 지역사회와 노동자에게 투자합시다."

이날 미시간 유세에서 바이든은 미국 제조업 활성화를 위한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미국산 구매)' 계획을 밝혔다. 그는 "미래는 모든 미국인 노동자에 의한 '메이드 인 아메리카'에 있다"며 "자동차 업계는 내 계획의 수혜자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해외로 일자리를 이전하는 기업에 불이익을 주기 위해 10% 세금을 부과하고, 미국에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투자하는 기업에는 보상 차원에서 10% 세금 공제를 시행하겠다고도 했다.

그로부터 4개월여가 지난 지난달 25일. 대통령이 된 바이든은 '바이 아메리칸'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연방정부가 인프라 시설을 구축하거나 장비를 살 때 미국산 상품과 서비스를 선택하도록 의무화하는 게 골자다.

기존 '바이 아메리칸' 규정을 보완해 예외를 더욱 엄격하게 제한하고, 백악관에 고위직을 신설해 제도 운용을 직접 감독하도록 했다. 우선 연방정부가 미국에서 생산되는 제품과 재료, 서비스를 구매하는 데 6000억 달러(약 661조원)를 쓰도록 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공약은 ’미국인이 낸 세금은 미국에서 미국인 근로자가 만든 부품을 사용한 미국산 상품 구매에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주창한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MAGA)' 슬로건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바이든의 '바이 아메리칸' 정책을 놓곤 "잘 맞지 않는 양의 탈을 쓰고 있는 보호주의라는 늑대"라는 비유까지 나온다. (데이비드 도드웰 통상정책 전문가) 동맹과 협의하겠다는 뜻을 밝힌 정도가 트럼프 전 대통령과 다를 뿐이라는 지적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바이 아메리칸(미국산 구매)'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AF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바이 아메리칸(미국산 구매)'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AFP=연합뉴스]〉

바이든 행정부는 다른 통상 정책에서도 트럼프와 유사한 행보를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일 아랍에미리트(UAE)산 알루미늄에 대한 관세를 부과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날 관세를 철회했는데, 바이든 대통령이 금세 복원했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NYT)는 "바이든이 무역에 관해 취한 첫 번째 중요한 조치 가운데 하나인데, 트럼프 행정부가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산 금속에 부과한 과중한 관세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무역전쟁을 벌이며 중국산 상품 5500억 달러(약 618조원) 어치에 부과한 10~25% 고율관세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 철폐할 것인지에 대해 지금까지 언급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 3월부터 여러 나라에 부과하기 시작한 철강과 알루미늄 관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바이든 참모들은 "정부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관세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포괄적인 검토를 수행할 것"이라는 원론적 입장만 밝히고 있다.

바이든의 '바이 아메리칸' 정책은 결과적으로 미국 경제가 처한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벌써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사설에서 "바이 아메리칸 계획은 목표를 잘못 설정한 정책"이라며 "미국인 노동자를 돕지 못할 뿐 아니라 부족한 재정 자원을 낭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바이 아메리칸' 정책 역사는 88년이나 됐다. 연방정부가 미국산 상품을 우선 구매하도록 하는 법안이 통과된 게 1933년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행정명령 10개에 서명해 연방 정부 조달시장에서 해외 기업을 내몰기 위해 노력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그 결과 앞으로 연방정부가 구매하는 철과 철강 제품은 미국산이 95%를 구성해야 하며, 다른 제품은 55%가 미국에서 제조돼야 한다. 이 같은 요건을 충족하는 부품을 찾는데 어려움 겪을 수 있고, 가격도 오를 수 있다. 즉 비슷한 품질의 상품에 더 많은 재정을 지출해야 한다.

미국 기업 경쟁력 하락도 불가피하다. 기업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소외되면 효율이 떨어지고, 장기적으로 생산성이 하락하면 일자리를 만드는 데 한계가 있다.

또 미국이 공공 조달 시장에서 해외 기업을 배제하면 해외에서 미국 기업이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유럽연합(EU)은 미국이 무역 장벽을 세우면 EU 조달 시장에 미국 기업 진출을 막는 방식으로 보복하겠다고 예고했다.

또 미국이 마냥 무역장벽을 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인 미국은 자국 기업을 우대하고 외국 기업을 차별하는 데 제한을 받는다. WTO 정부조달협정(GPA)에 따르면 18만2000달러(약 2억400만원) 이상 규모 계약은 해외 기업에 개방해야 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한 상점에 '바이 아메리칸(미국산 구매)'라고 적힌 문구가 내걸렸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한 상점에 '바이 아메리칸(미국산 구매)'라고 적힌 문구가 내걸렸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럼에도 바이든 정부는 왜 '트럼프스러운' 정책을 고수할까. 국내 정치적 이유가 가장 크다. 민주당은 전통적 지지 기반인 노동자 계층을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빼앗겼다. 미시간·펜실베이니아 등 쇠락한 공업지대로 불리는 러스트벨트를 내주고 정권도 넘어갔다. 이때문에 지난해 대선에서 제조업 노동자 지지를 되찾아오는 게 민주당의 가장 큰 숙제였다. 이젠 이들이 납득할만한 정책 성과를 2022년 중간선거까지 남은 21개월 안에 보여줘야 하는 게 바이든 정부의 과제가 됐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hypar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