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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배틀그라운드] 뺏은 정권, 또다른 군부가 쫓아내···쿠데타 단골은 21번 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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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제4차 산업혁명을 논하는 21세기에도 쿠데타는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반복하는 일상적 사건이다. 한때 유행인 줄 알았던 ‘쿠데타의 시대’는 계속된다.

끝나지 않은 ‘쿠데타의 시대’ #뿌리 깊은 군부 독재 DNA #쿠데타 뒤에 숨겨진 배후도

지난해 8월 아프리카 말리에선 8년 만에 쿠데타가 재발했다. 2019년 4월 수단에서도 군대가 움직였다. 이때 쫓겨난 오마르 알 바시르 대통령은 1989년 쿠데타를 계기로 집권했다. 쿠데타 정권을 또 다른 쿠데타가 쫓아낸 것이다.

3일 미얀만 카친 주 미치나에서 쿠데타 군 장갑차가 이동하고 있다. 이날 아웅산 수지는 체포된 지 이틀 만에 공식 기소됐다. [사진 STR=AFP=연합뉴스]

3일 미얀만 카친 주 미치나에서 쿠데타 군 장갑차가 이동하고 있다. 이날 아웅산 수지는 체포된 지 이틀 만에 공식 기소됐다. [사진 STR=AFP=연합뉴스]

남미에선 21세기를 시작한 2000년대에 들어선 직후 10년 사이에만 다섯번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2002년 베네수엘라를 시작으로 2004년 아이티, 2008년 볼리비아, 2009년 온두라스, 2010년 에콰도르까지 연이어 번졌다.

‘쿠데타’(coup d'etat)는 프랑스 말인데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한다는 의미다. 1851년 루이 나폴레옹 3세는 대통령 임기를 연장하기 위해 ‘12월 2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때부터 근대 국가에서 불법과 폭력적 수단으로 권력을 차지할 경우 쿠데타로 정의했다.

쿠데타 단골은 태국이다. 1932년 쿠데타로 전제군주제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이래 21번이나 크고 작은 쿠데타가 이어졌다. 첫 쿠데타는 왕권을 축소했지만, 그 이후는 왕권을 강화한 친위 쿠데타였다.

2006년 9월 태국 군부는 탁신 친나잇 총리를 몰아내는 국왕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군이 방콕 시내를 경비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6년 9월 태국 군부는 탁신 친나잇 총리를 몰아내는 국왕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군이 방콕 시내를 경비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6년 탁신 친나왓 태국 총리가 미국을 방문하던 중 태국의 19번째 쿠데타가 일어났다.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은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의 손을 들어줬다.

탁신 총리에게 반전의 기회도 왔다. 그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이 2011년 8월 총리에 올라다. 하지만 군대가 또 움직였다. 2014년 5월에 일어난 쿠데타로 또다시 권력을 빼앗겼다.

숨겨진 쿠데타 배후 세력 

두 번의 쿠데타 모두 사실상 태국 국왕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국민적 지지를 받던 탁신 총리는 집권 후 왕권 축소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태국에서 국왕의 권한은 막강하다. 군부가 무력으로 권력을 잡아도 국왕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물러나야 한다. 1992년에 발생한 쿠데타는 성공한 듯 보였지만, 국왕의 말 한마디로 없던 일이 됐다.

2016년 7월 16일 터키 앙카라에서 시위대가 쿠데타군 전차를 막아서고 있다. 이날 밤 터키 군부는 쿠데타를 진압했다며 터키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 위해 거리로 나설 것을 촉구했다. [사진 AP]

2016년 7월 16일 터키 앙카라에서 시위대가 쿠데타군 전차를 막아서고 있다. 이날 밤 터키 군부는 쿠데타를 진압했다며 터키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 위해 거리로 나설 것을 촉구했다. [사진 AP]

터키에서도 쿠데타는 일상이다. 1960년 이후 6번이나 반복했다. 가장 최근인 2016년 쿠데타 시도는 2003년부터 장기 집권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을 몰아내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에르도안 신변을 확보하지 못하며 실패했다.

쿠데타 가담 병력은 불과 1000명 수준으로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기회도 잡았다. 쿠데타군 F-16 전투기 2대가 에르도안이 탄 비행기를 따라잡았다. 에르도안은 전용기를 타고 휴가지에서 이스탄불로 급히 돌아오고 있었다.

격추 범위에 들어왔지만, 조종사는 끝내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에르도안은 무사히 착륙한 뒤 쿠데타를 진압했다. 쿠데타에 가담했던 군대가 시민들에 폭행을 당하는 웃지 못한 일도 일어났다.

2016년 8월 7일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이스탄불에서 열린 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앞서 7월 15일 쿠데타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사진 터키 대통령궁=AP]

2016년 8월 7일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이스탄불에서 열린 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앞서 7월 15일 쿠데타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사진 터키 대통령궁=AP]

왜 쏘지 않았을까. 여론 조사에서 터키 국민 중 32%는 쿠데타 미수 사건을 두고 ‘정적 제거를 위한 에르도안 대통령의 자작극’이라고 답했다. 물론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건 없다.

쿠데타는 한번 뿌리를 내리면 오래간다. 무력으로 취약한 왕정과 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은 군부의 ‘생존 DNA’는 오늘날까지 여전하다.

‘아랍의 봄’ 쿠데타에 무너져

1952년 7월 이집트에서 무함마드 나기브를 비롯한 청년 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때 자리 잡은 군부 정권은 반세기가 넘도록 군 출신으로 국가 지도자를 꾸려갔다.

2011년 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무바라크 대통령 30년 통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 2010년 튀니지 등에서 일어난 '아랍의 봄' 봉기는 중동 전역으로 확산돼 이집트에도 영향을 줬다. [사진 AP]

2011년 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무바라크 대통령 30년 통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 2010년 튀니지 등에서 일어난 '아랍의 봄' 봉기는 중동 전역으로 확산돼 이집트에도 영향을 줬다. [사진 AP]

2011년 2월 이집트 군부 정권은 마침내 무너졌다. 중동지역에 불기 시작한 ‘아랍의 봄’은 이집트 혁명으로 이어졌다. 1981년 10월 4대 대통령에 오른 공군 대장 출신 호스니 무바라크는 집권 30년 만에 권좌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기득권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군부는 1952년 쿠데타 이후 줄곧 특권층으로 자리 잡고 각종 이익을 독점했다. 2011년 혁명은 무바라크 개인의 몰락을 넘어 군부에도 위기로 다가왔다.

아랍의 봄은 짧았다. 2013년 7월 압둘 파타흐 알씨씨 국방부 장관 겸 군 총사령관이 주도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그는 2014년 3월 6대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했다. 군부 정권은 이렇게 부활했다.

2013년 7월 이집트 카이로 대통령궁 부근에서 공격 헬기가 주변을 살피고 있다. [사진 AP]

2013년 7월 이집트 카이로 대통령궁 부근에서 공격 헬기가 주변을 살피고 있다. [사진 AP]

1958년 이라크 쿠데타는 ‘위화도 회군’과 비슷했다. 그해 7월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 요청에 따라 이라크 군대가 출동했다. 하지만 아브드 알카림 카심은 군대를 돌려 바그다드로 진격했다.

압둘 살람 아리프가 주도해 카심을 몰아낸 1963년 쿠데타는 미 중앙정보국(CIA) 덕분에 가능했다. 1968년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가 주도한 쿠데타로 권력은 또 요동쳤다. 이때도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

중동·남미 쿠데타, 미국(CIA)의 은밀한 개입

알바크르는 1979년 지병으로 사임한 뒤 부통령에게 자리를 넘겨줬다. 이때부터 2003년까지 이라크를 통치한 건 바로 5대 대통령 사담 후세인이다. 후세인은 미국 덕분에 권좌에 오를 수 있었고 미국 때문에 권좌에서 내려왔다.

미국의 쿠데타 개입 흔적은 남미에서도 발견된다. 미국은 1961년 4월 피델 카스트로 쿠바 정부를 전복하는 군사작전 피그스만 침공을 비롯해 1964년 브라질 쿠데타, 1973년 칠레 쿠데타 등 사회주의 정권을 타도하는 쿠데타를 지원했다.

1991년 8월 구소련 수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진주한 쿠데타군 전차. [사진 AFP]

1991년 8월 구소련 수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진주한 쿠데타군 전차. [사진 AFP]

사회주의 체제에선 쿠데타가 별로 없다. 북한에서도 1994년 ‘6군단 사건’ 등 일부 거론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 과장됐거나 실체가 모호하다는 게 전문가 평가다. 사회주의 종주국인 구소련에선 1991년 8월 19일 한 번의 쿠데타가 있었다. 소련 공산당 보수파가 개혁ㆍ개방에 반대하며 일으킨 쿠데타는 이틀 만에 실패하고 오히려 소련 체제 붕괴를 앞당겼다.

광복을 미룰 뻔했던 일본 쿠데타…5·16에도 영향

일본에서 일어난 쿠데타 때문에 한국의 광복은 미뤄질 뻔도 했다. 1945년 8월 14일 ‘궁성 사건’으로 불리는 쿠데타가 발생했다. 일본 육군성 내 일부 청년 장교 집단은 무조건 항복에 반발해 ‘최후 1인까지 결사 항전’을 주장했다.

항전파 세력은 총리대신 등 항복파 제거를 계획했지만, 동조 세력을 구하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천황도 이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아 쿠데타는 하루 만에 없던 일이 됐다. 그대로 전쟁이 끝나면서 별다른 처벌도 없이 흐지부지됐다.

1979년 12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 당시 중앙청 앞에 계엄군 전차가 진주하고 있다. [중앙포토]

1979년 12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 당시 중앙청 앞에 계엄군 전차가 진주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웃 나라’ 일본은 한국의 ‘5·16 쿠데타’에도 영향을 줬다. 1936년 2월 26일 ‘2ㆍ26 사건’으로 불린 쿠데타가 있었다. 황도파로 불린 우파 청년 장교가 천황의 친정을 강화하고 부패 세력을 척결하자며 궐기했다. 고민하던 천황은 이틀 만에 원대복귀를 명령했다. 황도파 장교 중 일부는 자결했고 초급 장교 중 일부는 처벌을 피했다.

‘2.26 사건’에 가담했던 간노 히로시는 만주군으로 추방됐다. 여기서 만주군관학교 생도 박정희를 만나 가깝게 지냈다. 박정희는 일본 육군사관에서도 황도파 출신 사카키 중대장을 만났다.

6일 미얀마 양곤에서 열린 쿠데타 반대 시위에 참가한 시민이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이끄는 정당인 민주주의민족동맹(NLD) 당기가 그려진 얼굴 마스크를 쓰고 저항의 상징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EPA=연합뉴스]

6일 미얀마 양곤에서 열린 쿠데타 반대 시위에 참가한 시민이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이끄는 정당인 민주주의민족동맹(NLD) 당기가 그려진 얼굴 마스크를 쓰고 저항의 상징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EPA=연합뉴스]

민군관계 전문가 새뮤얼 헌팅턴은 쿠데타 성격에 따라 ‘변혁적 쿠데타’,  ‘정권수호적 친위 쿠데타’,  ‘거부의사의 쿠데타’로 분류한다. 하지만 본질을 들여다보면 기득권을 두고 벌어진 권력 찬탈과 옹호라는 속성은 공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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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는 135개 종족ㆍ민족으로 구성돼 있고 다양한 내부 갈등으로 사회는 분열돼 있다. 미얀마 군부는 내부 갈등을 명분으로 삼아 정치에 개입할 기회를 엿본다. 하지만 사회적 갈등 때문에 쿠데타에 저항할 수 있는 대안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얀마 군부가 언제든 눈치 보지 않고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고, 성공이 보장되는 배경이다.

6일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시민 수천 명이 참가한 쿠데타 불복종 시위가 열렸고 다른 도시로 확산하는 추세라고 한다. 이전과 다른 저항 운동에 세계의 이목이 쏠린다.

박용한 기자 park.yong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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